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홍일표 시인 / 즐거운 오독(誤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0.

홍일표 시인 / 즐거운 오독(誤讀)

 

 

   길가에 쪼그려 앉은 허리 접힌 노파,

   옆을 지나다 팔고 있는 물건을 힐끔 바라본다

   가물치, 가물치 새끼다

   순간, 길이 꿈틀 한다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가서 본다

   플라스틱 바구니엔 쪼그라든 가지 몇 개,

   길가의 코스모스가 살랑살랑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가지와 가물치 사이를 오가는 동안

   길은 저만치 흘러가고,

   나는 사라진 가물치를 찾고 있다

   눈 깜짝할 사이 가지가 가물치로,

   가물치가 가지로, 그렇게 전생과 후생을 다 살았다

   산 위에 걸터앉은 해는

   취한 눈으로 이승 너머를 기웃거리고,  

 

   나는 어느새 개망초 위를 날아가는 한 마리 잠자리였다

 

월간 『문학사상』 2006년 가을호 발표

 

 


 

 

홍일표 시인 / 고양이와 냉장고의 연애

 

 

  집 주인의 양육법이 궁금하다

  태생이 다른 농경과 유목의 혈통

  방금 전 냉장고가 삼킨 것은

  생선 몇 마리

  그 중 한 마리가 고양이 입 속으로 들어간다

  생선이나 육류를 좋아하는 식성이 닮았다

  냉장고와 고양이는 아픈 기억 탓인지

  긴 꼬리를 등 뒤에 감추고 산다

  고양이는 주로 검정을 선호하고

  냉장고는 주로 흰색을 선호한다

  가끔은 서로 옷을 바꿔 입기도 하는 것이

  그들의 습속이다

  둘의 연애는 유구하다

  본적과 취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고받는 눈빛이 뜨겁고 깊은,

  몸속에 환하게 불을 켜고 사는 그들은

  24시간 소등하지 않고

  푸른 눈빛으로 어둠 위에 군림한다

  냉장고 옆에 애첩처럼 옹크리고 있는 고양이가

  집 주인의 커다란 귓속을 밤새도록 들락거린다

 

계간 『시안』 2008년 겨울호 발표

 

 


 

홍일표 시인

198년 《심상》 신인상,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 『매혹의 지도』, 『밀서』와  평설집『홀림의 풍경들』이 있음. 지리산문학상, 시인광장 작품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