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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언희 시인 / 지병의 목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0.

김언희 시인 / 지병의 목록

 

 

  우스운 것에 밑줄을 긋는 병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병

  방안에서 길을 잃는 병

  혼자서 오중주를 연주하는 병

  체중계를 볼 때마다 기절하는 병

  주옥 같은 시를 보면 똥을 지리는 병

  죽은 사람과 잡담하는 병

  애인만 보면 토하는 병

  무엇이건 물어서 갖다 바치는 병

  썩어 문드러진 부위에 코를 대고 냄새를 즐기는 병

  자신의 악취에 자긍심을 갖는 병

  끝가지 참고 보기 힘든 코미디를 끝까지 참고 보는 병

  벌쭉벌쭉 똥구멍으로 웃는 병

  할지도 모르는 짓 때문에 따귀를 미리 맞아두는 병

  슬리퍼를 끌고 복도까지 나가 물벼락을 맞는 병

  2,3분마다 창밖을 내다보는 병

  나아보이면 보일수록 점점 더 나빠지는 병

  진단도 처방도 할 수 없는 병

  낫게 되면 죽는 병

 

시집 『요즘 우울하십니까?』(문학동네, 2011) 중에서

 

 


 

 

김언희 시인 / 가지마다 다른 꽃이

 

 

  가지마다 다른 꽃이 피었네

  아버지가 접목한 나무

  코를 자르고 귀를 붙였네

  귀를 자르고 발가락을 붙였네

  아버지가 접목한 나무

  가지마다 다른 열매가 맺혔네

  이 가지에 양 대가리

  저 가지에 개 대가리

  주저리주저리 열렸네

  아버지가 접목한 나무

  짐승의 피가 섞인 나무

  아침마다 터럭과 눈빛이 바뀌는 나무

  이 가지가 저 가지의 목을 감았네

  저 가지가 이 가지의 눈을 후볐네

  뿌리 너무 깊은 열매들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불구였네

  아버지가 접목한 나무

  불구의 열매가 불구의 열매를

  아귀아귀 따먹었네 뿌리 깊은

  열매를 뿌리 깊은 열매가

  으적으적 씹어 삼켰네

 

시집 『뜻밖의 대답』(민음사, 2005) 중에서

 

 


 

김언희 시인

진주에서 출생. 경상대학교 외국어교육과 졸업.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트렁크』(세계사, 1995)와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민음사, 2000), 『뜻밖의 대답』(민음사, 2005), 『요즘 우울하십니까?』(문학동네, 2011)가 있음.  2004년 '박인환 문학상' 특별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