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진규 시인 / 사과밭엔 가지 않겠어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1.

정진규 시인 / 사과밭엔 가지 않겠어

 

 

슬픈 사랑의 代行이여, 서로 간절해 있으면서도 몸을 내밀 수 없는 비극을 사과꽃 필 때 사과나무 밭으로 가면 볼 수가 있지. 그게 사과의 몸이야 벌들이 떼지어 날아다니면서 사랑의 가루받이를 하는 걸 볼 수가 있지. 벌들이 사과의 사랑을 떼지어 약탈하고 있지. 이제 사과나무 밭에는 가지 않겠어. 잔인해, 비극의 몸은 그래서 맛이 나겠지만 그래서 싱겁지 않겠지만 비극의 풍요를 보는 게 무서워, 당신도 그동안 약탈당한 사랑의 결실을 사랑해 오셨겠지. 껍질도 벗기지 않고 우적거리셨겠지. 단순한 살이 아니니까 우여곡절의 살이니까 맛이 있었겠지. 처음부터 충만이었던 사랑은 싱겁지. 그런 결실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싱겁지. 그래도 사과꽃 필 때 사과밭에는 가지 않겠어. 잔인해, 겁탈당한 결실이 맛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게 무서워, 그런 사과들을 上等品으로 비극의 아름다움을 上等品으로 팡팡 도장 찍는 세상이 무서워, 비극의 몸에 한번 맛들면 헤어나지 못하지. 싱거운 게 몸에 좋다니까! 금단이라니까! 나는 알아버렸어

 

웹진  『시인광장』 2012년 5월호 발표

 

 


 

정진규 [1939.10.19 ~ 2017.9.28]시인

1939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1964년 고려대학교 문리과 대학 국문학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나팔 抒情〉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마른 수수깡의 平和』(모음사,1965), 『有限의 빗장』(예술세계사),『들판의 비인 집이로다』(교학사, 1977), 『매달려있음의 세상』(문학예술사, 1979),

 『몸詩』(세계사, 1994), 『알詩』(세계사, 1997), 『도둑이 다녀가셨다』(세계사, 2000), 『本色(천년의 시작, 2004), 『껍질』(세계사, 2007), 『정진규 시선집』(책만드는집, 2007. 2. 1), 『공기는 내 사랑』(책만드는집, 2009), 『사물들의 큰언니』(책만드는집, 2011) 외 다수 있음.  기타 저서로는 독일어 번역 시집 『말씀의 춤(Tanz der Worte)』(독일 프랑크푸르트 아벨라  사에서 출간, 100편 수록, 2005. 12.)과 시선집 : 문학선 『따뜻한 상징』(1987) 외에 다수 있음. 한국시인협회상, 현대시학작품상, 월탄문학상, 공초문학상, 불교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만해대상 등을수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 1963년부터 현재까지 「현대시(現代詩)」 동인으로 활동․1988년부터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학(現代詩學)》 주간 역임․ 2017년 폐혈증 증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