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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진규 시인 /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0.

정진규 시인 /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 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悲哀)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의자(倚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재산(全財産)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幼年)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國土)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다시 나 차가운 한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재산(全財産)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시집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교학사, 1977) 중에서

 

 


 

 

정진규 시인 / 삽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시집 『껍질』(세계사, 2007) 중에서

 

 


 

정진규 시인

1939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1964년 고려대학교 문리과 대학 국문학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나팔 抒情〉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마른 수수깡의 平和』(모음사,1965), 『有限의 빗장』(예술세계사),『들판의 비인 집이로다』(교학사, 1977), 『매달려있음의 세상』(문학예술사, 1979), 『몸詩』(세계사, 1994), 『알詩』(세계사, 1997), 『도둑이 다녀가셨다』(세계사, 2000), 『本色(천년의 시작, 2004), 『껍질』(세계사, 2007), 『정진규 시선집』(책만드는집, 2007. 2. 1), 『공기는 내 사랑』(책만드는집, 2009), 『사물들의 큰언니』(책만드는집, 2011) 외 다수 있음.  

기타 저서로는 독일어 번역 시집 『말씀의 춤(Tanz der Worte)』(독일 프랑크푸르트 아벨라  사에서 출간, 100편 수록, 2005. 12.)과 시선집 : 문학선 『따뜻한 상징』(1987) 외에 다수 있음. 한국시인협회상, 현대시학작품상, 월탄문학상, 공초문학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 불교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만해대상, 김삿갓문학상 등 수상. 1963년부터 현재까지 「현대시(現代詩)」 동인으로 활동․1988년부터 현재까지 시전문 월간지 《현대시학(現代詩學)》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