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인 /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1922년 7월 『개벽』 25호 발표
작품 해설
시인 김소월(金素月). 그는 1902년 8월 6일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정식(廷湜)이다.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이돈화(李敦化)· 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20년에「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등을 《창조(創造)》誌에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어 「먼 후일(後日)」,「죽으면」,「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등의 작품들을 1920년 7월 《학생계(學生界)》 제1호에 실으면서 더욱 재능있는 시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가 활발하게 시창작에 전념했던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 뒤부터인데, 주로 《開闢》을 무대로 활약했다. 그 무렵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등을 《開闢》誌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그 당시는 물론, 거의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국민들이 애송하는 명시로서 각광받고 있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삭주구성 朔州龜城」, 「가는 길」, 「산 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 新天地》의 「왕십리 往十里」등을 발표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 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이 무렵에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했던 잡지별로 살펴보면, 1924년에는 《영대(靈臺)》誌 3호에 인간과 자연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인 사상이 깃들인 영원한 명시 「산유화(山有花)」를 비롯하여 「밭고랑 위에서」(1924), 「꽃촉(燭)불 켜는 밤」(1925), 「무신 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 「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 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文明》에 「지연 紙鳶」(1925)을 발표했다. 그리고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 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그후 구성군(郡) 남시(南市)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였으나 운영에 실패하였으며 그 후 실의의 나날을 술로 달래는 생활을 하였다.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이 되었다. 불과 5~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를 남겼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 「첫치마」, 「금잔디」, 「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먼후일」, 「꽃촉불 켜는 밤」, 「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인 김소월. 그는 근본적으로 민족적인 시를 쓰려고 노력했던 시인이다. 그는 시는 정서를 표현한 것이고 민족적이며 한국적인 근간을 이루는 것은 恨의 정서이고 그 형식은 옛부터 전해오는 민요의 가락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의 정서 중에는 민담 속에 담긴 恨과 개인이 겪는 여러 종류의 경험이 원인이 되는 恨등을 중요시했고 형식적인 면에서는 민요가 갖고 있는 음수율(4.4조 3.3조 4.3조 3.4조)과 7.5조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창작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의 시에 나타난 민요조의 가락을 보고 그의 시를 민요시라고 일컫기도 하고 혹은 민요조 서정시를 쓴 시인이라고도 한다.
김소월의 시세계의 또 다른 특징은 저항적 성격이다. 일반적으로 소월은 민요조의 서정시를 쓴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근래에는 많은 연구가들에 의해 저항적 성격을 띤 작품들이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가 저항적인 시를 쓴 직간접적인 필연성은 다음과 같다.
김소월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맞은 몰매로 인해 외상성 정신질환에 걸리게 된 점이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과 저항심을 길렀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감점기의 지식인이라면 정도의 차이지만 누구나 일제에 대해 저항의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민요시를 썼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저항의식의 표현이다. 민요시를 쓴다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문화운동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을 읊는 모든 시는 형이상학적인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시들은 대부분 자연의 어떤 현상을 통해 자연의 원리를 보여주고 그 자연의 원리를 통해 존재의 원리와 현상의 법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월의 스승이었던 김억의 말에 의하면 소월은 본인이 민요시인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소월은 민요시인보다는 사상적 깊이가 있는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에는 그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어 있는데「진달래꽃」과 「산유화」를 비롯한 여러 편의 시를 통해 형이상학적으로 깊이 있는 세계를 다루려고 한 소월의 의도를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오늘 소개하는 「진달래꽃」은 시집의 표제시인 동시에 그의 7.5조를 대표하는 시이기도 하며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고 발표 이후 지금까지 모든 국민들이 애송하는 시이기도 하다.
이 시는 소월시의 정수(精髓)로, 이별의 슬픔을 인종(忍從)의 의지력으로 극복해 내는 여인을 시적 자아로 하여 전통적 정한(情恨)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이 정한의 세계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가시리>, <서경별곡(西京別曲)>, <아리랑>으로 계승되어 면면히 흘러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와 그 맥을 같이한다.
4연 12행의 간결한 시 형식 속에는 한 여인의 임을 향한 절절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체념과 극기(克己)의 정신이 함께 용해되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떠나는 임을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는 동양적인 체념과,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는 임이지만, 그를 위해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는 절대적 사랑, 임의 '가시는 걸음 걸음'이 꽃을 '사뿐히 즈려 밟'을 때, 이별의 슬픔을 도리어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비애, 그리고 그 아픔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는 인고(忍苦) 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진달래꽃'이다. 이 '진달래꽃'은 단순히 '영변 약산'에 피어 있는 어느 꽃이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을 표상하기 위하여 선택된 시적 자아의 분신이다. 다시 말해, '진달래꽃'은 시적 자아의 아름답고 강렬한 사랑의 표상이요, 떠나는 임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며, 끝까지 임에게 자신을 헌신하려는 정성과 순종의 상징이기도 하다.
떠나는 임을 위해 꽃을 뿌리는 행위가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까닭은 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시적 자아의 사랑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꽃을 뿌리는 행위의 표면적 의미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산화공덕(散華功德)' ― 임이 가시는 길에 꽃을 뿌려 임의 앞날을 영화롭게 한다는 '축복'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임을 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강한 만류의 뜻이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그저 이별을 노래하는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니라, 이별이라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존재론의 문제로도 확대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월은 그의 다른 대표작인 <산유화(山有花)>에서처럼, 여기서도 '진달래꽃'의 개화와 낙화를 사랑의 피어남과 떨어짐, 즉 만남과 이별이라는 원리로 설정함으로써 마침내 사랑의 본질을 깨달은 그는 더 나아가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생성과 소멸의 인생의 의미를 깊이 인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버림받은 여인과 떠나는 남성 간에 발생하는 비극적 상황이 초점을 이루는 설화적 모티프 ― 여성의 인종(忍從)과 남성의 유랑(流浪) 및 잠적(潛跡) ― 를 원형(原型, archetype)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여성 편향(女性偏向, female complex)의 '드리오리다'·'뿌리오리다'·'가시옵소서'·'흘리오리다' 등의 종지형을 의도적으로 각 연마다 사용함으로써 더욱 애절하고 간절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피학적(被虐的, masochistic)이던 시적 자아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마지막 시행과, '걸음 걸음'·'즈려 밟고 가시옵소서'에서 나타나듯이 그저 눈물만 보이며 인종하는 나약한 여성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떠나는 남성이 밟고 가는 '진달래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바로 여성 시적 자아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꽃을 밟을 때마다 자신이 가학자(加虐者, sadist)임을 스스로 확인해야 하는 것을 아는 시적 자아는 그러한 고도의 치밀한 시적 장치를 통해 떠나는 사랑을 붙잡아두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 「건강(健康)한 잠」(1934), 「상쾌(爽快)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 「팔벼개 노래」(1927), 「돈타령」(1934), 「삼수갑산 (三水甲山)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3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참고문헌>
文學과 人間 (金東里, 白民文化社, 1948) 現代詩論 (鄭漢模, 民衆書館, 1973) 꿈으로 오는 한 사람 (吳世榮編, 文學世界社, 1981) 詩와 想像力의 構造 (金賢子, 文學과 知性社, 1982) 金素月 硏究 (申東旭編, 새문사, 1982) 韓國現代詩人硏究 (金載弘, 一志社, 1986)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섭 시인 / 城北洞 비둘기 (0) | 2019.05.20 |
---|---|
한하운 시인 / 보리피리 (0) | 2019.05.19 |
한용운 시인 /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0) | 2019.05.18 |
서정주 / 내리는 눈 밭에서는 (0) | 2019.05.18 |
이육사 시인 / 편복(蝙蝠) (0) | 2019.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