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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정 시인 / 서귀포를 3D로 굽는다
바람의 바다는 가시리마을에 온몸 기대고 있다. 삼킨 파도로 섬돌공장을 짓고 철썩, 담이 내려앉을 때 잊고 산 사람 다시 출력한다.
횃대 위에 드리운 남은 옷 한 벌 양복 주머니에 곱게 수놓은 손수건 꽂고 해넘이와 함께 둑길 걷는 발자국을 굽는다.
태양은 영영 지지 않고 바다를 깨운다. 동굴 속 어둠도 일어서 4.3 평화공원에서 그 이름을 찾는다.
잊혀 지지 않는 물굽인 한란을 수놓으며 차디찬 눈 속에서 어처구니 꽃 피운다.
잠들지 못한 숱한 몽돌들 해변으로 몰려오는 서귀포를 3D로 굽는다.
계간『시와 문화』 2018년 여름호 발표
오현정 시인 / 어느 달인
공을 가지고 노는 남자를 동영상으로 보았다.
눈 맞은 두 마음 놓칠세라 가슴과 가슴이 뒹굴었다. 등과 등으로 부드럽게 말아 올리는 그의 혀, 온몸이 공의 세포다.
목덜미에서 어깨로, 허벅지에서 발가락으로 숨 가쁘게 호흡을 굴리는 그는,
낮은 숨소리로 그녀의 냄새를 껴안은 채 잠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그녀는 모든 각을 최초의 둥글어짐으로 되돌렸다.
가두어두었던 원시의 궁금함이 풀리듯 공속에 잠자는 진실을 그녀에게 바치자 텅, 텅, 텅 울렸던 절망.
벼랑을 짚어주는 둥근 바람으로 들장미 가시를 삼키고 그의 등이 검붉게 떠올랐다.
눈시울 소름 돋는 갔다가 되돌아오는 관계의 정석을 그는 날마다 공위에서 펼쳤다.
계간『시산맥』 2018년 여름호 발표
오현정 시인 / 여름 한낮
여름 한낮 잠에서 깨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日沒을 본다.
지금이 아침인가, 저녁인가, 내 어깨 위로 내려앉는 서운한 저녁답.
풀꽃 날리는 바람 사이로 귀밑머리 고운 이모가 어른거린다.
매일 밤 향기로운 술을 빚는 과수원이 어른거린다. 참말 과일처럼 익어서 나도 땅으로 떨어지고 싶다.
그런 시간, 문득 그리워지는 아득한 일곱 살 이모네 과수원.
오현정 시인 / 꽃을 꽂으며
밤마다 내 가슴 위를 날으다가 유리수반에서 航海하는 빨간 꽃잎 하나.
돌미나리로 담근 물김치 우물만큼 차지면 빨간 꽃잎 하나 띄워야지.
긴 알락콩 한 줌, 청어 두어 마리, 오이 서너 개. 그리고 아침볕 한 바구니.
말끔히 닥은 식탁에 쏟아놓으면 오색 꽃잎으로 차려지는 아침상.
1978년《현대문학》10월호 초회 추천작
오현정 시인 / 눈 뜨는 바다
밤바다 물결 위 파도가 불을 달고 일렁인다 멀어져가는 고기잡이배 사금파리 같은 추억으로 반짝인다
맨발 아래 모래톱 속으로 사르륵 사르륵 꽃게들 바램 숨어들고
어둠 속에 검푸른 바다 네 앞에 서면 깊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깨우는 소리 들린다
내 안에 이는 파도 해초 위에 스며들어 달려가지 못한 채 알알이 날아오는 모래에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솔잎을 쓰는 바람 앞에도 넘실대며 떠나가는 배 내가 타고 간다
깊게 빛나는 두 눈을 다시 한 번 크게 뜨고 그물을 던진다 밤에도 불 밝히는 너의 가슴속으로.
오현정 시인 / 풋감이 익어갈 때
단감나무 아래 떨어지는 아직 떫은 녹색 감을 소금물에 담근다.
오지항아리 뚜껑 가득 동글납작 작은 몸매 끝에 세 잎 날개 품고 익어간다.
연한 껍질 베어 물면 노오랗게 드러나는 속살 안으로만 삭여드는 네 피 흘리는 감수성은 지금도 우리 집 마당을 지키고......
빛나는 감잎 위에 앉는 바람도 부끄러워 고개 숙인 채 땅으로 안기는 거름의 소리.
하얀 꽃 지고나면 꽃받침은 감꼭지 된다 내 입술에 묻어 있는 떫은 맛 달게 달게 감잎 접시에 담아오는 햇살이 된다.
오현정 시인 / 경마장 풍경
1.
경주를 기다리는 말들 사이로 허리 구부정한 노인, 준마를 살핀 뒤 주름진 손으로 소나기1호의 마권을 산다.
출발을 알리는 소리, 하늘로 오르자 말들이 달린다. 사람들의 시선도 일제히 숨 가쁘게 달린다.
얼마나 소년으로 다시 가고 싶었는지 노인이 소리 지른다. “소나기1호, 너라면 할 수 있어” 노인의 고함소리에 소년처럼 가볍게 선두를 달리는 소나기1호.
경마장을 울리는 노인의 소리 “너라면 할 수 있어, 너라면 할 수 있어” 트랙을 맴도는 먼지 속에 떠오르는 소나기1호.
2.
노인의 눈에 소년이 된 준마는 새로운 인생을 싣고 달린다. 이루지 못한 노인의 꿈이 경마장을 돌아 아득히 저 먼 곳에라도 가는 걸까?
선두를 지키는 소나기1호 때론 제 길을 벗어나도 천리라도 가고 말 듯,
날쌘 몸에 상큼한 꼬리 번개처럼 노인 앞을 지나면 발굽을 갈 때 반짝이던 네 눈물이 사계절 속 인생의 뜨거운 여름에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경마장을 적신다.
오현정 시인 / 상처
1
봉선화 아픈 눈물이 쉬는 집 꽃집에는 향기로운 친구가 있으니까 외롭지 않아
해마다 핏빛 꽃잎이고 싶어 찾아오는 꽃집 서로 얼굴 부비면 어둠이 만져주는 그리운 이별 기어이 꽃물 흔적 남긴다.
2
피지 말라 피지 말라 삭여보아도 만나고 싶은 꽃씨
아직 열리지 않는 봉오리 맺힌 채 멀리 있어도 내 마음에 꽃피고 있는 너 사랑이여.
오현정 시인 / 꽃잎이 떨어지던 날
교정엔 목련나무 눈부시게 하얀 꽃 피우고 있었다. 단발머리 마주한 사진을 보고 너와의 만남에 가슴 설렌다.
꽃집 가는 길에 목련이 핀다. 꽃잎은 생명 틔우는 몸짓으로 떨더니 사뿐히 봄눈인양 바람결에 나부낀다. 하얀 목련꽃잎 하나 가득 실어온 정을 안고
우리는 우리의 다른 생활을 서로의 얼굴에서 읽는다. 눈빛마저 젖은 강물 잠시 달려온 시간이 멈춘 듯.
잃어버리지 말아야지 품에 안지만 너와 나 같은 하늘 아래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우리의 만남이 서먹해지고 우정보다 진한 남자들의 의리를 배울까? 차 대신 독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 내 눈앞에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 목련꽃잎들.
1989년 《현대문학》 10월호 2회 완료 추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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