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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 시인 / 누수
겨울의 꼬리를 베고 누운 K요양원. 침상이 눅눅하다. 귀는 어디에도 없어 말이 흘러가고 기저귀마다 눈물이 한 덩이다.
그녀의 거울은 불안했고 날카로운 끝이 그녀의 손목을 긋는 동안, 차가운 웃음은 그녀의 기억을 가두었다. 여러 입들이 달려 있는 그녀의 맥락 없는 소음이 역류하는 시간, 멈춘 시선이 움직인다.
쏟아지는 빛이 그녀의 방을 덮친다. 누수의 원인을 찾을 수 없어 그녀는 출렁거리고 거동은 불가능해졌다.
인내심이 부족한 바람은 병실이 비좁고 요양사의 향기는 그녀의 코끝을 스친다. 바람은 그녀의 뺨을 때리고 전자시계는 시간의 목을 죄여온다.
창문으로 탈출을 시도한 달빛 제 몸을 밧줄 삼아 담장을 내려간다.
계간 『시인정신』 2018년 여름호 발표
김경선 시인 / 안개의 무게
아침부터 배가 부르다 쪽방에 처방된 수북한 한 끼 밥, 간암 3기 몸에 링거를 꽂아 화분에 물을 주고 마그리트 그림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아내와 춤을 추고 아이들이 먹는 자장면 먹는 냄새가 춤을 춘다 고양이가 내 등을 소파처럼 긁고 바람이 바다의 끝을 말아 올리는 동안
약냄새에 젖은 박스를 싣는다 700원짜리 하루가 가득한 운수 좋은 날 나는 밤마다 아내를 기다린다 처음 보는 신약이 조제된 오늘은 얼굴 없는 아내가 오는 날,
삶은 식상하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행운, 손바닥에 아내를 올려놓고 공기놀이를 한다 아이들을 하나씩 올려놓으면서 우린 더 식상하게 행복해진다
아내 옆에 나를 오려 붙인다 내 기억은 장밋빛으로 변질되었다 날마다 기적을 꿈꿀 수 있다는 것 꿈꾸는 것은 나의 사생활,
꿈이 부풀수록 물주는 속도가 빠르다
계간 『시인정신』 2018년 여름호 발표
김경선 시인 / 뒤
항상 뒤에 처져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나를 향해 그들은 실컷 떠들고 마음껏 재단하고 편집한다.
그들만의 잔치는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행해진다. 저들이 나를 멋대로 분석하는 동안 머리를 처박은 새처럼 날갯죽지를 웅크리고 나는 나를 흘려듣는다.
앞만 보고 가는 그들은 뒤를 잊는다. 그들의 따돌리고 있는 뒤를 앞지르지 못해 따라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뒤가 된 뒤를 뒤가 있어 앞이라는 것을,
앞만 보고 가는 성급한 사람들이 결코 볼 수 없는 세상을 뒤가 보고 있다는 것을
오늘도 그들이 외면한 세계를 일찌감치 선점하고 가만가만 독식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앞이라고 믿는 동안은,
월간 『우리시』 2017년 3월호 발표
김경선 시인 / 바람의 은어
바람이 불자 나무는 허공을 향해 무작위로 나뭇잎을 방생한다. 겁이 많은 것들은 서로를 의지해 떨어진다. 허공을 붙들려다 놓친 것들은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명으로 흩어진다.
나무를 나무라 부르다가 나무의 언어를 바람이라고 쓴다. 나뭇잎은 꼬리지느러미를 달고 허공의 아귀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탐지하려고 바닥으로 구른다.
땅 위에 귀를 대고 비비는 것들이 경쟁하듯 바스락거린다.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쏟아지자 행인의 발목을 붙잡기도 한다. 호화로운 옷을 입은 몇몇은 눈에 띄어 책갈피에 갇혔다 더러는 바람의 등을 타고 홀연히 사라지고 하나하나 스러져 갔다.
바람이 다녀갈 때마다 길을 몰라 그들은 크게 요동했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자 바람이 흘리고 간 은어를 듣는다.
몸이 썩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리고 땅에 스미면 뿌리에 당도한다는
월간 『우리시』 2017년 3월호 발표
김경선 시인 / 길을 걷다가
생을 걸으며 마음의 깊이도 사랑의 결말도 쉬 결론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생의 갈피갈피마다 젖은 풀잎이 무성하고 피고 진 흔적이 난무한 저 길 복판 태양이 진 언덕 위로 서리가 내리고 마른 갈잎도 간직 되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발아하지 못한 꽃씨를 품고 몸을 내 던지는 꽃잎,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대지는 겨울 내내 출렁거리며 암내를 풍기는 아, 생이란 것 결국 썩어 발아하는 것.
생이라는 슬픈 길을 걸을 때 성에가 낀 창을 후후 불던 꽃잎도, 스스로 꽃 피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염려는 어수룩한 눈물바람인 것인데 생이 기막히다는 것, 생이 막막하다는 것, 다시 꽃피울 틈을 위해 떨고 있는 긴 겨울의 노래에 불과하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김경선 시인 / 날개를 깁는 여자
수십 년을 재봉틀에 앉아 날개를 깁는 여자 한 번도 시린 날개를 펴지 못해 앉은뱅이가 된 여자 퇴화된 날개를 방석 삼아 바느질을 한다. 태양의 빛을 낚아 동정으로 달고 나무를 심어 열두 폭 크기로 날개를 저장한다. 꽃술에 날아드는 벌, 나비 날개를 수선해 주는 여자 날개의 비밀을 지켜주다 시력을 놓친 여자 돋보기 속에 날개란 날개는 다 감추어 놓고 절대 꺼내 자랑하는 법이 없다.
여자의 주소는 재개발동 접근금지호
날다가 죽을 너 걷다가 죽을 나 가볍긴 마찬가지
내 날개 오래전 끈 떨어졌어도 나에겐 기부할 날개가 남았단다. 날아봐라 날아봐 날개가 자랄 테니 살아봐라 살아봐 날개가 보일 테니 깃털에 꽂히는 여자의 자작 타령 그 여자 반찬은 시어터진 김치 한 조각 그 여자 낡은 골무처럼 굽은 등 새털 날개 푸르게 돋네.
김경선 시인 / 뼈 속의 도굴꾼
세탁소 철재 옷걸이 아래 구겨진 옷들이 추파를 던지며 웅성거린다 경상도 사내의 어눌한 눈웃음이 가볍게 묻어나는 옷걸이.
낡은 세탁기를 돌리면 타인이 흘린 부푸라기 뒤로 힘겹게 걸어오는 오랜 슬픔을 만난다. 세월에 닳은 손톱으로 보푸라기를 뜯어내면 둥글게 번지는 바람센 날의 기억들.
첫 아이를 낳고 산후풍이 정찰했던 내 몸 둘째를 낳으니 성난 모래바람으로 일어서 시린 몸으로 내 뼈에 부딪친다.
오월이면 태풍은 다시 지상에 길을 내고 뼈 속의 고통의 무늬를 그린다. 고요의 뼈가 부딪치는 소리들 들린다.
김경선 시인 / 사각의 벽에 박힌 사내
사각의 벽이 사내와 함께 일어선다. 햇빛을 겨냥한 그의 눈빛은 마지막 외침으로 남고. 봄을 수소문하던 사내의 가슴엔 곰팡이처럼 어둠이 자랐다.
낮에는 새우처럼 누워 곰팡이를 재배하는 사내 적갈색 어둠을 등에 지고 검버섯 핀 몸을 비틀어 하늘을 향해 기도인지 삿대질인지 허공을 자르고 또 자른다.
벽에 달라붙은 담쟁이로 가려진 사내 막노동을 하다가 다친 다리는 가로수 이파리처럼 흔들거렸다.
사내의 어미는 날마다 윤달을 기다린다. 죽음을 준비하는 수의를 생각했지만 아니란다. 어둠처럼 놀이터 미루나무에 기대어 바람을 닮아가는 아들에게 윤달이 필요하단다.
하늘과 땅의 신(神)이 한눈을 팔 때 아들의 사주를 바꾸고 싶어 이사를 해야 한단다
겨울을 마감 세일로 바쁜 뒷골목 의류수거함엔 헤진 구두와 옷들이 아쉬운 얼굴을 내밀다가 할머니 한숨 소리에 목젖만 탄다.
2005년 《시인정신》신인상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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