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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순례자(巡禮者)의 잠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

강은교 시인 / 순례자(巡禮者)의 잠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무기(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든 마차에 싣고

집 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낮만 내리는 비

낙과(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궁륭(穹隆)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들여다보면 안개 속을

문은 어디서 열리고 있는가.

생전에 박아두었던

곤한 하늘 뿌리를 뽑아들고

폐허의 햇빛 아래 전신을 말리고 있는

눈먼 얼굴들이여

 

떨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

이제 알았으리, 바람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이 늘 날으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월간 《사상계》 1968년 9월호 신인문학상 당선시

 

 


 

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