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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완호 시인 / 손가락은 도마 위에서 지워진다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4.

박완호 시인 / 손가락은 도마 위에서 지워진다

 

 

손가락은 도마 위에서 죽는다. 사람이 자기 땅에서 천천히 저물어가듯 모든 것은 제 바탕 위에서 춤추다 사라진다.

 

뜨겁게 달아오르다 만 양은냄비뚜껑 같은, 창백한 낯빛의 태양이 오래 자리를 비운 신 대신 하늘을 쉼 없이 맴돌고 있을 때

 

주방에서는 칼날에 잘려나간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요리사의 오른손에 들린 식도를 피해 요리조리 몸을 뒤트는 왼손의 무한질주 속

 

손가락은 갑자기 눈앞에서 지워진다. 갓 뽑아낸 쪽파줄기처럼 싱싱한 힘줄이 규칙적으로 오므려졌다 펴졌다 하는 사이

 

당근이, 무가, 양파가, 두부가, 고깃덩이가 차례로 생을 마감하고 더는 자를 게 없어진 칼날이 무디게 허공을 가르려는 찰나

 

도마는 문득 손가락을 비워낸다. 손끝의 감각이 무디어진 타짜가 어느 날 화투판을 뜨듯, 누구에게나 자기 바닥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날벼락처럼 들이닥친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7월호 발표

 

 

 


 

박완호 시인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1991년 《동서문학》에 시 「귤껍질을 벗기며」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너무 많은 당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아내의 문신』,『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내 안의 흔들림』등이 있음. 김춘수시문학상(2011) 수상. 〈서쪽〉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