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완호 시인 / 손가락은 도마 위에서 지워진다
손가락은 도마 위에서 죽는다. 사람이 자기 땅에서 천천히 저물어가듯 모든 것은 제 바탕 위에서 춤추다 사라진다.
뜨겁게 달아오르다 만 양은냄비뚜껑 같은, 창백한 낯빛의 태양이 오래 자리를 비운 신 대신 하늘을 쉼 없이 맴돌고 있을 때
주방에서는 칼날에 잘려나간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요리사의 오른손에 들린 식도를 피해 요리조리 몸을 뒤트는 왼손의 무한질주 속
손가락은 갑자기 눈앞에서 지워진다. 갓 뽑아낸 쪽파줄기처럼 싱싱한 힘줄이 규칙적으로 오므려졌다 펴졌다 하는 사이
당근이, 무가, 양파가, 두부가, 고깃덩이가 차례로 생을 마감하고 더는 자를 게 없어진 칼날이 무디게 허공을 가르려는 찰나
도마는 문득 손가락을 비워낸다. 손끝의 감각이 무디어진 타짜가 어느 날 화투판을 뜨듯, 누구에게나 자기 바닥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날벼락처럼 들이닥친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7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배옥주 시인 / 꽃가루 알레르기 (0) | 2019.10.04 |
|---|---|
| 신미균 시인 / 카오스 (0) | 2019.10.04 |
| 조성국 시인 / 복날이면 생각나는 기억 (0) | 2019.10.04 |
| 강희안 시인 / 나탈리 망세*의 첼로 외 1편 (0) | 2019.10.03 |
| 조용미 시인 / 물소리에 관한 소고 외 1편 (0) | 2019.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