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조용미 시인 / 물소리에 관한 소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3.

조용미 시인 / 물소리에 관한 소고

 

 

물소리가 높다 낮다 밝다 어둑하다 짙다 옅다 깊다 얕다 두껍다 얇다 거칠하다 부드럽다 촘촘하다 드문드문하다 고요하다 요란하다 쟁쟁하다 아늑하다……

 

고요하다와 쟁쟁하다가 가장 마음에 든다

 

일정한 리듬이 변주되고 되풀이되는 물소리의 화음은 보아서도 들리고 들어서도 보이겠지만 저 음표들을 속속들이 손바닥에 다 옮겨놓을 수는 없다

 

내 몸속 세포의 흐름이 저 물소리의 우주적 운율과 다르지 않아 또 몸에 귀 기울여야겠구나. 이젠 몸을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있겠나 묻지 않는다

 

물소리가 최대치로 밝아올 때 내 귀가 틔었다

소리에도 빛과 어둠이 있다는 걸, 그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물소리는 몸의 실핏줄을 통과해 다른 음색과 리듬으로 미묘하게 바뀐다

내 게으른 궁리가 마침내 저 물소리의 음영화법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

 

시집 『기억의 행성』(문학과지성사, 2011) 중에서

 

 


 

 

조용미 시인 / 검은 담즙

 

 

가슴속에서 검은 담즙이 분비되는 때가 있다 이때 몸속에는 꼬불꼬불 가늘고 긴 여러 갈래의 물길이 생겨난다 나뭇잎의 잎맥 같은 그 길들이 모여 검은 내, 黑河를 이루었다

 

흑하의 물줄기는 벼랑에서 모여 폭포가 되어 가슴 깊은 곳을 가르며 옥양목 위에 떨어지는 먹물처럼 낙하한다

 

폭포는 검은 담즙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다 생의 단 한 순간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비애는 그을린 태양 아래 거칠고 긴 숨을 내쉬며 가만히 누워 있다

 

쓸갯물이 모여 생을 가르는 검이 되기도 하다니 검은 폭포 아래에서 모든 것들은 부수어져 거품이 되어 버린다 거품이 되어 날아가는 것들의 헛된 아름다움이 너를 구원할 수 있을까

 

비애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니 幻이 끝나고 滅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는 것을 검은 담즙이 모여 떨어지는 흑하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지상에서 가장 헛된 것이라 부르겠다

 

지상에서 가장 헛된, 그 아름다움의 이름은 絶滅이다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 2007) 중에서

 

 


 

조용미(曺容美) 시인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과 산문집 『섬에서 보낸 백 년』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