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소유 시인 / 자줏빛 紫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3.

박소유 시인 / 자줏빛 紫

 

 

  이 빛을 보면 불안하다

  몸 아픈 곳을 짚어내는 빛이며

  깊게 스며들어 뼛속까지 아린 자주감자고

  혓바닥까지 늘어진 자목련 꽃잎이며

  피 터지게 싸우고 난 수탉의 볏이다

  구구절절, 피 멍 든 생들은

  처음부터 그런 빛 그런 몸을 지녔으니

  더 아플 것 없겠다 쉽게 말하지 마라

  세상이 온통 자줏빛이다

  누구는 상처를 꽃으로 읽지만

  나는 벌써 꽃이 상처로 보인다

 

시집 『어두워서 좋은 지금』(천년의시작, 2011) 중에서

 

------------------------------------------------------------------------------------------------



박소유 시인 / 허무맹랑

 

 

입이 없으면 생이 가벼울 거라 생각했는데 먹자골목, 줄지어선 간판 불빛에 하루살이 떼가 까맣게 붙어있다 막무가내 제 하루를 다 걸고 거래 중이다 위험천만하다 입과 가까워진다는 건

 

치매 앓던 노인이 먹을 걸 이불속에 감춰두었다 얼마나 깊이 감추었는지 자신도 잊고 가져가지 못한 게 죽은 뒤에 다 나왔다 아무리 긁어 먹어도 냄비 바닥에 굴러다니는 생선 눈알처럼 결국엔 남기고 갈 것을

 

입 하나에 매달려 살았나 며칠 금식을 했을 뿐인데 실밥이라는 말에도 사무친다 톱밥, 꽃밥, 실밥이라는 말은 나비 날개 놓아 주듯, 가볍게 밥을 놓아주는 일 아닌가 공중을 밥으로 채우고 저절로 공복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인데

 

젖통을 양쪽에 안고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금식하는 동안 내게 와서 표류하던 그 많은 밥때가 차곡차곡, 마른 나뭇잎처럼 쌓였다 부스럭, 자꾸 허기를 들추는 바람에게 모른 척 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시집 『어두워서 좋은 지금』(천년의시작, 2011) 중에서

 

 


 

박소유 시인

1961년 서울에서 출생. 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1990년 《현대시학》 당선. 시집으로 『어두워서 좋은 지금』(천년의시작, 2011)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