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소유 시인 / 자줏빛 紫
이 빛을 보면 불안하다 몸 아픈 곳을 짚어내는 빛이며 깊게 스며들어 뼛속까지 아린 자주감자고 혓바닥까지 늘어진 자목련 꽃잎이며 피 터지게 싸우고 난 수탉의 볏이다 구구절절, 피 멍 든 생들은 처음부터 그런 빛 그런 몸을 지녔으니 더 아플 것 없겠다 쉽게 말하지 마라 세상이 온통 자줏빛이다 누구는 상처를 꽃으로 읽지만 나는 벌써 꽃이 상처로 보인다
시집 『어두워서 좋은 지금』(천년의시작, 2011) 중에서
------------------------------------------------------------------------------------------------ 박소유 시인 / 허무맹랑
입이 없으면 생이 가벼울 거라 생각했는데 먹자골목, 줄지어선 간판 불빛에 하루살이 떼가 까맣게 붙어있다 막무가내 제 하루를 다 걸고 거래 중이다 위험천만하다 입과 가까워진다는 건
치매 앓던 노인이 먹을 걸 이불속에 감춰두었다 얼마나 깊이 감추었는지 자신도 잊고 가져가지 못한 게 죽은 뒤에 다 나왔다 아무리 긁어 먹어도 냄비 바닥에 굴러다니는 생선 눈알처럼 결국엔 남기고 갈 것을
입 하나에 매달려 살았나 며칠 금식을 했을 뿐인데 실밥이라는 말에도 사무친다 톱밥, 꽃밥, 실밥이라는 말은 나비 날개 놓아 주듯, 가볍게 밥을 놓아주는 일 아닌가 공중을 밥으로 채우고 저절로 공복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인데
젖통을 양쪽에 안고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금식하는 동안 내게 와서 표류하던 그 많은 밥때가 차곡차곡, 마른 나뭇잎처럼 쌓였다 부스럭, 자꾸 허기를 들추는 바람에게 모른 척 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시집 『어두워서 좋은 지금』(천년의시작, 2011)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구석본 시인 / 떠돌이별 외 1편 (0) | 2019.10.03 |
|---|---|
| 김재근 시인 / 달을 든 해안선 외 1편 (0) | 2019.10.03 |
| 이채민 시인 / 그날 이후 (0) | 2019.10.03 |
| 오유정 시인 / 우리들의 식탁 (0) | 2019.10.03 |
| 김종목 시인 / 국수 한 그릇 (0) | 2019.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