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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재근 시인 / 달을 든 해안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3.

김재근 시인 / 달을 든 해안선

 

 

#1

물망초 꽃말만 기억한다. 절벽을 기어올라 뛰어내리기 좋은 날씨. 풍뎅이처럼 귓속이 윙윙거린다. 누구도 자신의 눈 속에 흐르는 바람을 읽지 못한다.

 

#2

내가 가지고 있는 붉은 눈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 내린다.

 

#3

월력으로 계산해보면 아버지의 입술은 살아 있어야 한다.

 

#4

방부제를 먹고 아버지는 주무신다. 자신의 명부전에 놓인 쌀로 밥을 지어 먹는다. 썩지 않아 오래 잠든다.

 

#5

피어싱을 위해 먼저 귀를 씻어야 한다. 당신과 내 귀가 겹친다. 소라껍질같이 구부러진 바다에서 나와 당신의 귀가 익사한다.

 

#6

아프리카 아프리카 내 혀는 석탄색이다. 검은 물이 흐르는 문장에서 아프리카 아프리카 슬픈 노래를 캐냈다.

 

#7

방언을 배우고 욕이 쏟아진다. 통성기도를 하며 엄마의 빼빼마른 손목을 자른다. 나의 말은 이제 천상의 말이 되었다.

 

#8.

쌍둥이 언니의 영혼은 밤이면 옮겨 다닌다. 머리는 둘로 침대에 혀를 나눈다. 누구도 쌍둥이 언니를 모두 사랑할 수는 없다.

 

#9

그림자가 되기 위해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마스카라, 검은 눈으로 밤이 되어간다. 벽에 걸린, 구멍 난.

 

#10

짧은 문장을 쓰려면 혀를 잘라야 한다.

 

#11

해안에 비가 내린다. 칼끝으로 묘비에 빗소리를 새긴다. 묘비에만 비가 내린다.

 

#12

창문에 해안선이 달라붙어있다. 파도소리 쏟아지고 창문은 깨어진다, 어쩔 수 없이. 달이 환하다.

 

계간  『시와 반시』 2012년 여름호 발표

 

 


 

 

김재근 시인 / 물로 빚은 우주

ㅡ우포

 

 

  어느 날

 

  눈동자에 얼음이 낀다

  머리를 풀고

  죽은 새에게 저녁의 안부를 묻는다

 

  울음이 아름다워

  물의 행로를 따라 지구 저편이 물들고

 

  한번쯤, 자신이 한 말은 돌아와

  제방을 떠도는

  바람이 된다 입술이 휘도록

  휘파람 불고

  저녁만 있는 마을

  식물의 표정으로 머리카락이 자란다

 

  외계의 시간

 

  태어나지 말아야 할 밤이 연속으로 온다

  그림자에 대해 지금은 할 말이 없다

  행성이 반짝이는 건 물속에 자신의

  그림자를 숨기기 위한 것,

  늪에 스며든 그림자는 외계(外界)였다가

  짐승의 젖은 발굽소리였다가

  물 위를 흐르는

  검은 해파리의 울음이기도 하다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예감 하나,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눈동자는 울음을 번식시킨다

 

  물로 빚은 우주

 

  발이 닿지 않는 세계

  음성만이 연주되는 세계

  죽은 요정의 세계

  보이지 않는 눈동자의 세계

  검은 문장의 세계

  울음이 떠다니는 세계

  결별을 위해 우거지는

  아름다운 손목의 세계

 

  예감 하나

 

  바람이 사나운 건,

  물속에 누운 오래된 사람의 눈에 고인 울음을 꺼내기 위한 것

 

  잠수복을 입고 잠든다

  언 눈동자에 바람의 유언이 기록된다  

 

웹진 『문장』 2012년 3월호 발표

 

 


 

김재근 시인

1967년생 부산에서 출생. 부경대학교 토목과 졸업. 2010년 제 10회 《창비》신인시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