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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현정 시인 / 순결하다는 것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1.

오현정 시인 / 순결하다는 것

 

 

  ‘길’이란 영화를 함께 보고난 후

  비가 쏟아지는 국제극장 골목에서 우산대로 부인을 마구 후려쳤다는 김수영 시인은

 

  아방가르드한 애인 같은 아내가 없었다면

 

  목마른 대지가 빨아들이는 폭우가 될 수 있었을까

  바람에 일어서는 풀의 기둥,

  가장 자유롭게 흐르는 매혹의 구름이 되었을까

 

  뭉게뭉게 시와 연애하는 동안

  빵도 왕관도 주지 않는 애첩이

  지난한 피를 찍어 꿈틀거리는 살을 도려내고 꿰매라고만 했을 것이다

 

  순결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픔을 숨기고 홀로 산속을 헤매다 짐승을 만나 울고 있을 때

  바위 아래 길을 내주고 나눌 수 있는 그 사람에게 내 전부를 주는 것이다

 

  길이란 말하자면

  한 영혼이 만나는 첫, 빗방울이자

  마지막, 숨이고 싶은 것이다

 

계간 『애지』 2018년 여름호 발표

 

 


 

오현정(吳賢庭)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숙명여대 불문과 졸업. 1978년, 1989년『현대문학』 2회 추천완료로 등단. 시집으로 『몽상가의 턱』, 『광교산 소나무』, 『고구려 男子』, 『봄온다』, 『물이 되어, 불이 되어』, 『에스더 편지』, 『마음의 茶 한 잔․기타 詩』,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등이 있음. PEN문학상, 월간문학동리상, 들소리문학대상, 중국장백산세계문학상, 애지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국문협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여성문학인회 이사, 한국시인협회 이사. 문학의 집 서울, 숙명문학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