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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용국 시인 / 그맘때, 물의 기억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4.

한용국 시인 / 그맘때, 물의 기억

 

 

  눈동자 속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고

  물 밖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나무들은 그저 서 있었지

  그게 왜 그렇게 슬펐을까.

  때로는

  마음도 개발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나무들은 그저 서 있었는지도

 

  바람이 불었고

  물결이 조금 일렁거렸다

  빛과 빛 사이에서

  캄캄하게 구겨진 목소리들이 떠다녔다

  바로 이 때다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만나는 풍경과 헤어지는 풍경 사이로

  이파리들이 떨어졌다

  가볍게 흔들리며

  물 속으로 눈동자가 번져갔다

  눈동자 속으로 물이 차올랐다

 

  눈동자 속을 걸어가는 물의 끝까지

  물 밖을 걸어가는 눈동자의 끝까지

  벽 없는 마음은 얼마나 공포 가득한지

 

  물에 비친 나무들에게도 눈이 있었다.

  자기 등 뒤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간 『파란』 2016년 겨울호 발표

 

 


 

 

한용국 시인 / 앵두맛

 

 

  함께 걷던 사람이

  나무를 가리키며

  앵두군요라고 말했다.

 

  붉고 동그란 열매들이

  먼 나라의 언어 같았다.

  열매 속은

  잉잉거리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유월이군요.

  이상기후가 계속되지만

  여전히 앵두는 익어가는군요.

 

  앵두 몇 알을 입에 넣었다.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어디로 걸어 가는지

  알 수 없어졌다.

 

  이런 게 앵두 맛이군요.

  고개를 돌렸는데

  앵두 나무도 없고

  함께 걷던 사람도 없었다.

 

계간 『파란』 2016년 겨울호 발표

 

 


 

한용국 시인

1971년 강원도 태백에서 출생. 2003년《문학사상》신인상에 〈실종〉 등으로 등단. 건국대학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시집으로 『그의 가방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다』(천년의시작, 2014)가 있음. 현재 서울교대, 연성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