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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명춘 시인 / 박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4.

함명춘 시인 / 박쥐

 

 

별채에 박쥐 한 마리 날아들었다

침묵은 그의 유일한 세간살이였고 어둠은 그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는 그 외의 일체의 어떤 것도 탐하지 않았다 먹지도 않았다

별채는 마을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있었다

입주하자마자 그는 장도리처럼 곳곳에 박힌 햇볕을 뽑아냈다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두려움이 그를 덮쳤는지

저녁 어스름이 질 때만 그는 어디론가 나갔다가

크고 단단한 침묵과 어둠을 등에 한 짐 지고

동트기 전 새벽이슬을 밟으며 돌아왔다

언제부턴가 그 짐은 무언가를 짓는 데

필요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날마다 그는

자갈이나 모래처럼 침묵과 어둠을 섞어 공그리를 치고

바닥을 다진 뒤 벽을 세웠다 그렇다,

그는 별채 속에 더 큰 별채를 짓고 있었다

별채 속의 별채가 완성된 듯 더 이상 그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문 앞엔 갖가지 고지서와 신문이 쌓여갔다

우리는 그 별채에 한 발자국도 접근할 수 없었다

별채 주위엔 깊고 높은 고요의 담장까지 세워져 있어

우리들의 심장박동마저 귀청이 나갈 정도로 큰 소음이 되었고

당연히 사소한 그 어떤 한 마디의 말조차도 꺼낼 수 없었다

각자 마음 속 어딘가 감춰두었던 욕망도

자신만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죄악과 위선도

엑스레이에 찍힌 것처럼 뼈째 드러났다

들어간다 해도 너무 어두워 돌아 나올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성질이 급한 누군가는 포클레인을 몰고 와 담장과 지붕을 부수고

벽을 허물어뜨렸지만 소용없었다 양파처럼

까도까도 보다 더 큰 별채가 버티고 있었다

그에 대한 의혹과 의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는 별채 속의 별채 속으로

몇 광년 거리의 별처럼 점점 멀어져 갔다

 

계간 『시사사』 2018년 11~12월호 발표

 

 


 

 

함명춘 시인 / 매둥지

 

 

적막 외엔 바람도 한 점 없는 산속이었다. 느닷없이 폭설이 쏟아져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보디빌더처럼 자신의 근육을 자랑하던 산이며 길이며 나무들은 온데간데없고 염전 위의 하얀 소금 같은 것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수북이 쌓이던 소금은 얼마 후 하얀 솜털처럼 부풀어 올랐고 밟을 때마다 쿠션감을 느낄 수 있었다. 큰 대자로 누워 긴 잠에 빠진 거대한 백곰의 불룩한 배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이 눈길이 백곰의 품이라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지만 이상스레 포근하고 따뜻하기도 했다.

 

어딘가 밟지 말아야 할 곳을 잘못 밟은 것일까. 누워있던 거대한 백곰이 벌떡 일어나 나를 밀어 넘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두어 바퀴를 굴렀고 복숭아뼈가 돌부리에 부딪혀 비명을 질렀다. 순간 산중의 적막은 얼음장처럼 쫙 갈라졌고 적막에도 틈바구니가 있는지 수십 마리씩 웅크려 있던 새들이 앞뒤 안 보고 하늘로 달아나고 있었다. 백곰의 품속을 거닐던 나의 달콤한 꿈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의 현실은 왼쪽 발목에 타박상을 입은 채 절룩거리며 길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모 잡지사의 자유기고가로 일을 했는데 '우리의 명당을 찾아서'라는 기획특집 취재를 위해 산중에 있는 모 가문의 묘를 탐방하고 내려오던 참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두려움이 커져 가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색이 스님 같았다. 그는 길을 잃은가 본데 그쪽은 막다른 길이고 곧 어두워지니 자신이 거하는 곳에 하룻밤 묵고 가라고 했다. 난 생명줄을 잡듯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따뜻한 아랫목이 있는 절집을 떠올리며.

 

하지만 그가 멈춘 곳은 절벽이었다. 그는 큰 소나무 허리에 묶여 있는 동아줄을 건네주었다. 난 당황스러웠지만 발목의 통증과 추위 때문에 망설임 없이 동아줄을 잡고 내려갔다. 얼마 안 가 턱이 있어 발을 딛고 보니 절벽 안쪽으로 비좁은 토굴이 나 있었다. 내부는 제법 온기가 있었다. 그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주었다. 차를 마시며 왜 이런 곳에 거하냐고 물으니 그는 이곳은 이 산의 눈에 해당하는데 세상을 더 멀리 또 넓고 깊게 볼 수 있어 머물게 되었다고 했다. 난 문득 그가 풍수가처럼 땅을 읽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 어디가 천하제일의 명당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머뭇거림도 없이 단박에 대답하였다.

 

“이 지구가 천하제일의 명당입니다.”

 

순간 무엇엔가 한 방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하기야 그 많은 은하계에서 이 지구만큼 아름다운 초록별이 있었던가. 그의 말은 산줄기가 되어 이어지고 난 새털처럼 푹신한 낙엽더미 위의 담요 속에서 두 귀를 열어 놓고 있었다.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쳐 들어왔다. 난 소리 지를 틈도 없었다. 거대한 새가 토굴 속의 나를 부리로 물고 끌어내더니 자신의 등 위로 올려놓고는 밤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거의 별이 손에 잡힐 때쯤 그만 움켜쥐고 있었던 새 깃털이 뽑혀 난 구름 아래로 소리 지를 틈도 추락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그는 이미 어디론가 나간 후였다. 난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 모를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절벽 아래로 아주 먼 곳에 위치한 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 복사꽃이 필 무렵 난 은인을 찾아 그곳을 향했다. 소나무에 매어 있던 동아줄은 온데간 데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돌부리들을 밟고 내려가 보았다. 토굴은 텅 비어 있었다. 난 마을로 내려와 절벽의 토굴을 가리키며 밭을 매는 어르신께 여쭐 말씀이 있다고 했다. 그는 여기 사람들은 그곳을 매둥지라고 부른다고 했다. 먼 옛날 과거를 포기한 선비가 머릴 깎고 들어앉아 수도를 하다가 득도해 매가 되어 날아갔다는 설이 전해지고 겨울까지만 해도 실제로 매가 둥지를 틀고 살았는데 봄이 되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겨울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못 믿겠다는 듯 본체만체하며 묵묵히 밭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음푹 패여 들어간 절벽의 토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진짜 스님이었는지 이름은 뭐였는지 이제는 얼굴조차도 희미해진 그야말로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는 그를 떠올리며. 시간이 갈수록 절벽의 토굴은 점점 매의 눈이 되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 모를 그날의 꿈속에 난 다시 서 있는 것 같았다.

 

계간 『시작』 2019년 봄호 발표

 

 


 

 

함명춘 시인 / 작별

 

 

밤새 읽었던 책을 덮고 창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집 전체가 목선(木船)처럼 꿀렁거리더니 물이 들이치고 있었다

세상은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서둘러 창문을 닫고 아내와 아이를 찾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유일하게 안방 문만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열려고 하면 문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왔다

아내가 아꼈던 발코니의 반은 떨어져 나갔고

식탁에 차려진 아직 따뜻한 밥을 보니 불과 몇 분 전에

대재앙이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에 아내는

아이의 책가방을 챙겨서 학교까지 배웅하러 나갔을 것이다

그는 아직 표류하고 있을지 모를 가족의 이름을 외쳤다

수평선만이 멀리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내의 고집으로 집 바닥까지 통째로 목조로 지었던 탓에

대재앙 속에서 그만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정할 수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간도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식량은 살아 돌아올지도 모를 아내와

아이를 위해 준비한 며칠 분의 쌀과 생수 몇 통 뿐이었다

창고엔 골프채와 낚싯대가 가득했다 그는 골프광이자 낚시광이었다

낚싯대를 뽑아 들고 대충 수리를 한 발코니에서 낚싯줄을 드리웠다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입질이 와 낚아채니 대어(大魚)가 끌려 나오고 있었다

대어를 구워 먹기 위해 더는 쓸 데도 없을 전공서인 법 관련서와

의뢰인들의 사건 서류 뭉치들로 불을 피웠다

불을 더 지피기 위해 나무로 된 반짇고리를 넣으려 할 때였다

뚜껑이 열리더니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아내의 일기장이었다

그는 뒤적거리다 일기장 맨 마지막 부분에서 멈추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들어오는

     그에게 집은 모텔쯤 되는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타인처럼 만나면

     으레 그와 인사하고 헤어지는 게 지긋지긋하다

     난 이제 그에게 작별을 통보하려고 한다

     언제 우리가 사랑을 했었던 적은 있었든가

     아니, 미워하기라도 했었던 적은

     하지만 어쩌나 며칠 전 난 담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난 졸지에 그와의 완전한 작별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거기에다 하나밖에 없는, 아빠를 그리라고 하면

     골프공이나 낚시 바늘을 잔뜩 그려놓는 아이까지

 

그는 일기장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으며 바닥에 고갤 파묻었다

그의 온 몸을 가늘게 흔들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녁노을이 해풍과 함께 밀려와 거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 열리지 않는 안방 문 너머에서 아내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시 귀를 기울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손과 발로 두들기고, 걷어차고

온몸으로도 부딪혀 보았지만 안방 문은 꼼짝 하지 않았다 이번엔

아내가 치는 피아노에 맞춰 노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 클랙슨 소리도 뒤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진 것 같았다

저 너머엔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던 세상이 있는 것 같았다

창고에서 골프채를 들고 와 안방 문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곳곳에 뚫어진 구멍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안방 문은 끝내 부서졌지만 이내 새로운 안방 문이 생겨나고 있었다

턱 밑까지 바닷물이 차올라 와도 그의 골프채는 멈추지 않았다

수평선만이 멀리서 또 다른 수평선 위에 떠 있는 세상에 유일했던

그의 집이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계간 『시인수첩』 2019년 봄호 발표

 

 


 

함명춘 시인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활엽수림〉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무명시인』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