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순 시인 / 유언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

강순 시인 / 유언장

 

 

  끈끈이에 붙은 날개가 내 유언장이다.

  날 선 바람에 붙잡혀 밤까지 떠밀려 왔다.

  빠져나오려 발버둥 칠수록 악착같은 문장이

  숨구멍을 턱, 막는다.

  파리 하나 죽어도 세상은 아무도 몰라

  나는 안데스 산맥 위를 유영하던 콘도르 독수리라는 기억

  그것이 이 비극의 실마리인지 모른다.

  나의 다리는 당신 속을 우아하게 걷는 홍학의 것이고

  나의 부리는 당신 주검을 쪼던 갈까마귀의 것인지도

  출렁, 왼쪽으로 사십 도 각도

  밤은 죽어가는 문장이 내지르는 비명으로 소란스럽다.

  다시 출렁, 오른쪽으로 이십 도 각도

  망각 속에 일어서는 날카로운 통점

  출렁, 발버둥 칠수록 끈끈이 속으로 빨려드는 백 톤의 질문

  출렁, 천 톤의 대답

  대답의 무거움이 질문의 가벼움보다 더 서럽다.

  출렁, 날개가 조금씩 찢어진다.

  낯선 문장을 새기는 오른손은 내게 원래 없는 것

  그동안 변명들로 사기 친 죗값

  썩은 세포들을 쳐낼 손톱이 없는 곤충

  마침내 날갯죽지가 툭, 찢어진다.

  나는 고작 바닥으로 고속 추락하는 파리일 뿐

  처음부터 내게 날개 같은 건 없었는지도

 

계간 『문학과 사람』 2018년 여름호 발표

 

 


 

 

강순 시인 / 새의 행방

 

 

  창문 밖 서어나무

  과거로 달아나는 바람을 덮고 누워

  햇살을 조금씩 베어 물며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한다.

 

  새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작은 러시아 인형처럼 몸을 떠는 애인아

  새 소리 아직 들리지 않는

  그대 옆에 나란히 누워 볼까.

 

  털어내도 털어내도 다 털리지 않는 게 질문이다.

  질문들을 바닥에 털어내며

  허공에 없는 입을 다무는 이여

 

  새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3월의 부산한 고요 속

  푸른 옷을 다시 꺼내 입는 이곳은

  왼쪽 가슴 두 시 방향 안쪽

  봄이 질문 속에서 해답을 잃은 지점.

 

  고단한 몸을 가진 애인아

  과거로 달아나는 바람을 덮고 누워

  천천히 오는 새를 함께 기다릴까.

 

  서어나무, 새의 깃털 색깔을 아직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계간 『애지』 2018년 여름호 발표

 

 


 

 

강순 시인 / K씨와 반지하방

 

 

월세방엔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요. 맹그로브 나무가 축축한 방바닥에 쓰러지고 발이 잘린 그림자가 침대를 지배해요. 밤마다 바람이 분 건 아니에요. 낮마다 태양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에요. 질문들 때문이에요.

 

그를 위한 의자가 수십 개 놓여요. 질문과 질문과 질문 속, 어둠은 빛보다 먼저 존재하고 더 오래 머물러요. 뉴턴이 사과와 지구 사이에서 등이 잠시 필요했듯, 의자들은 나무와 그림자와 어둠을 받히느라 밤새 등이 아파요 질문들 때문이에요.

 

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고 창밖을 지나가요. 그들도 시간에게 월세를 사는 그의 겸손한 척하는 이웃들이에요. 이웃들은 모두 같은 월세를 계약하고 모두 다른 월세를 내는 데 익숙해요. 그는 아직 몇 달치 월세가 밀려 있어요. 궁색한 답변을 찾으며 시간의 눈치를 보고 있어요 질문들 때문이에요.

 

이제 아침이에요. 빛이 질문들을 몰아내요. 맹그로브 해안에 떠밀려온 나무가 순식간에 뿌리를 내려요. 두 발이 생겨난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요. 월요일 아침 방향으로 바삐 걸어가요. 등에 단단히 붙어사는 시간 때문이에요. 앞만 보고 달려가요. 이웃들처럼 그도 출근을 서두르고 있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계간 『애지』 2018년 여름호 발표

 

 


 

강순 시인

제주에서 출생. 1998년 《현대문학》에 〈사춘기〉 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