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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금진 시인 / 배를 타고 가다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

최금진 시인 / 배를 타고 가다

 

 

  협과 불협 사이에 강이 있고, 그 강에 안개가 낀다.

  우리가 탄 배는 서쪽으로 가는데 꼭 동쪽으로 가는 것 같다.

  누군가 뱃머리에 서서 노래를 한다.

  뒤 돌아 보지 마라, 백 년이 가려면 아직 백 년이 남았으니

  시를 쓰는 것도 너에게 가는 길일까.

  우리가 지극한 정성으로 서로의 에로스가 된 후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을 잉태하여

  마침내 자기를 낳을 수도 있을 텐데

  떠돌이, 떠돌이로만 살았구나, 협과 불협의 강을 따라

  만져보면 얼굴 푸석한 안개

  나를 너라고 불러볼 때 느껴지는 기이한 쓸쓸함으로

  저 강물에 스며들 수도 있을 텐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지의 음처럼

  수면 위를 유령처럼 떠도는 이 느낌, 느낌

  오직 이 느낌만이 우리의 신이었던 것일까.

  지팡이를 짚고 선 노인은 그만 정박하자 하고

  대머리 수도승은 술이나 진창 먹고 취하자 하고

  청년은 목을 맨 채 물로 뛰어들고

  나는 시를 쓴다, 시를 쓰는 것으로도 신에게 갈 수 있을까.

  이 지독한 안개를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는 원시 어류나 파충류의 표정을 닮았다.

  협과 불협의 사이에 강이 흐르고

  의미와 무의미 속에 해가 진다

  이리로 오라고 손짓 하는 강변 원주민들은

  오래전 정착하여 죽음을 경작하고 죽음을 탈곡 한다.

  뱃머리에 서서 노래하는 너의 지워져 가는 얼굴

  아아, 백년을 살고 다시 또 백년을 살아도

  우리가 온전히 사람일 수 있을까.

  안개가 너와 나의 입에서부터 기어 나오고

  누군가 다급하게 나를, 주인님, 주인님, 부를 때마다

 

반년간 『서정과 현실』 2017년 하반기 29호 발표

 

 


 

 

최금진 시인 / 곤계란

 

 

  곤계란 삶을 때 계란 우는 소리가 난다.

  사방 벽을 두드리다 벽에 스미지도 못하고 덜그럭 덜그럭 냄비를 구르는 소리

  닭이 되지 못한 병아리 새끼는 삐약 삐약 울면서

  연약한 부리로 껍데기를 쪼고 있었던 걸까.

  병든 아내는 피 묻은 깃털과 축축한 곤계란이 맛있다고 한다.

  껍데기는 방의 외벽

  그 안에는 밖에서 몰려든 외풍이 아랫목에 이불을 쓰고 앉아 덜덜 떨고 있다.

  태어나기 직전에 깨지는 곤계란처럼

  바스락거리는 비극을 두르고 아내는 잠속에 몸을 누인다.

  누렇게 곯아터진 달덩이를 벗기면 시커먼 아내의 얼굴이 잠시 환해지고

  닭발처럼 거칠고 초라한 아내의 손이 불쑥 흰 접시 위에 담겨진 채

  형광등 아래 놓인다.

  알은 하나의 방, 하나의 꿈

  간밤에 닭은 세 번 울었고

  아내가 가꾸었던 동글고 따뜻했던 세계는 자꾸 금이 갔다.

  그리고 그 금이 간 껍데기를 열자 머리털이 다 빠진 어린 병아리 한 마리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죄수처럼 붉은 핏줄을 목에 걸고 있다.

  알은 막다른 아침, 우리는 그 안에서 깨진 부리로 바깥을 향해 고개를 내민다.

  곤계란 속에는 눈이 퉁퉁 부은 병아리가 울고 있다.

  아내는 지금 그것을 먹는다.

  놀란 입을 계란처럼 동그랗게 벌리고

 

계간 『문학의 오늘』 2017년 여름호 발표

 

 


 

 

최금진 시인 /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가 말라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장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갔다.

 

 


 

 

최금진 시인 / 과일가게 앞의 개들

 

 

  생선의 해진 살점처럼 구름이 떠다니는 거리는 비릿하다.

  러닝셔츠만 걸치고 여름을 나던 시절이 사내를 거쳐 지나와

  다시 과일가게 앞에서 모기향을 피우고 있다.

  지워지지 않는 색깔을 뒤집어쓰고 파리들은 맴돈다.

  사내가 펼쳐드는 부채는 잎맥까지 다 말라버린 나뭇잎 같다.

  바람이 코앞에서 우수수 떨어져 꼼짝도 않는다.

  몽롱해진 정신 속에 이따금 손님처럼 졸음이 찾아오고

  검은 씨들이 검버섯으로 박혀 있는 사내의 꿈이 깜짝 놀라

  깨어질 때, 수박 속살을 파먹는 파리들은

  아무리 쫓아도 얼굴과 수박의 붉은색을 구별하지 못한다.

  사내가 러닝셔츠를 들춰올리고 바람을 불어넣는다.

  배꼽만 남아 배꼽이 썩어가는 배꼽참외들의 냄새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느냐는 듯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으름장을 놓는 사내의 가게 앞으로

  비루먹은 개들이 떼지어 지나간다.

  제 몸을 다 토해내기라도 할 듯 헐떡이며

  입 안 가득 상한 생선냄새를 질질 흘리며

  사내는 사과를 하나 집어 러닝셔츠 안쪽으로 닦는다.

  바라보는 시선들을 깔보며 으적으적 깨물어 먹는다.

  목구멍까지 주름이 잡힐 갈증들이 바닥에 고개를 떨군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오후가 툭, 비닐봉지 속으로 던져진다.

 

 


 

 

최금진 시인 / 무엇이 그녀를 역전에 박아놓았나

 

 

  역전 광장에 앉아 있는 거지 여자의 하루가

  신신파스처럼 욱신거린다.

  멍은 그녀의 오갈든 잎사귀

  얼굴과 팔과 가슴에 매달고 그녀는 웃는다.

  담배를 입에 물고 숨을 쉬며

  죽은 새의 영혼 같은 입김을 꺼내놓는다.

  가끔 연기로 도넛을 만들어 집어먹는 시늉을 하며

  추억의 허기로 바싹 마른 여자의 젖가슴이 흔들린다.

  침을 삼키며 시비를 걸어오는

  덕지덕지 피딱지가 앉은 사내의 흐릿한 눈

  서로의 추운 몸을 깊이깊이 박아넣고 쉬어가자고

  헤헤헤, 남자의 술병에 매달리는 여자의

  등 위로 꽁지 뽑힌 비둘기들이 난다.

  광장에 달라붙은 껌자국처럼 어둑해진 눈으로

  오후 여섯시의 시계탑이 그들을 내려다본다.

  불빛 켜지는 뒷골목마다 깨진 소주병이 퍼렇다.

 

 


 

 

최금진 시인 / 바짝 마른 붉은색의 추억

 

 

  죄지은 것이 많아 장미는 얼굴을 들지 못하는가.

  마침내 열반에 들려는가 뼈다귀로

  노를 저어 하늘에 이르려는가.

 

  바닥이 드러나는 저 붉은 사해바다 속으로

  발 없는 귀신처럼 나비들이

  떠다닌다 깨진 유리병 거꾸로 박혀

  고행의 깊이를 재어보는 콘크리트 담장 위에서

 

  마른 줄기를 펼쳐

  서로의 인연을 이어보려는 줄장미들아

  온몸의 피를 올려 지난날을 게워내는구나.

  가시관에 너덜거리는 홍포를 입고

  면벽하고 섰구나 곪아터질 듯

  하늘이 부풀어오르고

 

  소금냄새가 밀물처럼 밀려오는 오후

  누군가 창문을 열고 주르륵

  걸레를 비틀어 짠다.

 

 


 

 

최금진 시인 / 운동과 정지 사이에 공이 구른다

 

 

  주위의 긴장을 다 집어삼키며 공이 구른다.

  각질이 앉은 뱃가죽을 밀며 미끄러진다.

  풀숲에선 스스스 살 떠는 소리가 들린다.

  검은 비늘을 달고 아스팔트의 관절이 꿈틀거린다.

  어둠은 똬리를 틀고 저녁 속에서 눈을 반짝인다.

  공기는 소름이 돋아 차가워진다.

  공은 안 보이는 다리가 두 개

  어스름 속, 사람들이 이무기처럼 걸어다닌다.

  노을 속에 꺼내놓은 둥근 해를 다시 삼키고

  지구도 천천히 우주의 풀숲으로 기어들고 있다.

  제 몸보다 큰 어스름을 한꺼번에 먹어치운

  신호등의 붉은 눈알이 반들거리고

  차들이 일제히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공이 떼구르르 웃으며

  희미한 내리막의 경사를 따라 아래로 굴러간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굴러간다.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당선시

 

 


 

 

최금진 시인 / 제비와 싸우다

 

 

  처마 밑에 제비가 집을 짓고 있었다.

  사내가 물을 뿌리고 긁어 버렸다.

  생활 앞에선 사소한 것도 용서할 수 없었다.

  제비들의 커다란 분노가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떨어진 나뭇가지며 짓이겨진 흙들이 물에 씻겨 나갔다.

  무정했으므로 언제나 할 말이 많았다.

  그 많은 말들이

  다 시가 되지 못할 줄 알면서도 시를 썼다.

  제비들은 가지 않고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올 여름 장마를 걱정하고 있었다.

  달라질 게 없으니 닥치고 입 다물어야 한다는 걸

  수없이 떠나보내며 깨달았다.

  울부짖는 제비의 목구멍 깊이 자리한 검은 구멍

  몸이 까놓은 구멍

  먹어라, 슬픔도 한 끼 식사다.

  솜털 같은 작은 분노가 부르르 떨며 떨어져 내리고

  제비는 착하고 여린 짐승이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부서진 둥지, 그 허공에 걸쳐진 흰 바람벽에

  바람 숭숭 새는 언어를 물어 나르며

  우리는 잠시 높고 쓸쓸하기로 하였다.

 

월간 『월간문학』 2017년 9월호 발표

 

 


 

 

최금진 시인 / 헛수고

 

 

  나 헛수고를 하겠네.

  다 소용없고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 깨어 있겠네.

  거울을 보고, 시를 쓰고, 창문을 닫고, 잠에 들겠네.

  잠들어 헛헛한 꿈을 꾸고

  헛헛한 아침을 맞겠네.

  헛수고로 하루를 경영하여

  쫄딱 망하거나 쫄딱 비를 맞으며

  망연자실 우산 쓰고 돌아가는 사람들 바라보겠네.

  눈알 녹아내린 검정개가 되어 발등을 핥으며 돌아가겠네.

  아무도 없는 집, 아무도 반기지 않는 밤에

  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화분에 물을 주고

  세수를 하고, 기도를 하고

  아아, 이젠 그만 사람들을 용서하겠네, 보내주겠네.

  나 살아서 끝내 헛수고를 하겠네.

  바다에 나가 종일 걸었던 길을 놓아주고

  미끼도 꿰지 않은 낚시를 하고, 끝없이 허탕을 치고

  텅 빈 망태를 메고 돌아가겠네,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고

  돌아올 때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고, 설거지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잠이 오지 않는 눈알을 멀뚱멀뚱 어두운 거실에 내려놓고

  생각이란 생각은 모두 내일로 미루고

  빈털터리 어둠 속에 나를 꿇어 앉혀 시를 읊게 하고

  헛것을 섬기듯 시를 쓰겠네.

  허망한 것을 알면서도

  나 일생 헛수고를 하다 가겠네.

 

반년간 『서정과 현실』 2017년 하반기 29호 발표

 

 


 

최금진 시인

충북 제천에서 출생. 1997년《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창비, 2007), 『황금을 찾아서』(창비, 2011),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창비, 2014)과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쳔년의시작, 2014)이 있음. 현재 한양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