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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철 시인 / 생명의 윤리-‘기계적’에서 ‘인간적’으로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1.

김명철 시인 / 생명의 윤리-‘기계적’에서 ‘인간적’으로

- 오민석의 「쌍계사 벚꽃길의 연어떼」, 금은돌의 「a가 사과를 던지면」과

  김유선의 「우리의 안녕」을 읽으며

 

 

무릇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새끼를 낳기 위해 수많은 죄를 지어야 한다. 동물들은 먹고 마셔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에 상처를 내거나 아니면 그 무엇인가를 죽여야만 한다. 식물들도 역시 먹고 마시기 위해 그들만의 죄를 지어야 할 것이다. 무생물도 무생물 나름대로의 죄를 지으면서 새끼를 낳을 것이다. 바위가 돌멩이가 되고 돌멩이가 모래가 되고 모래가 흙이 되고 그 흙이 사람이 되는 것을 ‘낳는다’라고 인간의 의식으로 규정한다면 그들도 우리가 아직은 모르는 그들만의 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죄의식의 영(靈)이 있을 것 같다. 어렴풋하긴 하지만 우리도 그들 속으로 살짝 들어가 그들의 정령(精靈)이라는 것을 보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세상만물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제 새끼를 가질 수 있는 셈이다. 종교설화인 아담과 이브도 죄를 짓고 나서야 새끼를 낳을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죄의 새끼들이 죄의 새끼들을 낳는다”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유지하고 또 그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짓는 죄가 과연 죄라고 할 수 있을까.

 

“먹고 먹어 오직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인 것들은 죄가 없다”는 말도 당연하게 들린다. 먹기 위해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나 그것이 오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생명’ 안에 프로그램처럼 내장된 생명의 의무인 것 같다. 그러니까 “배도 고프지 않은데 총질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죄악이다. 저만 더 잘 살겠다고 배도 고프지 않은데 총질을 해대며 다른 타자들 위에 군림하겠다는 패악이 문제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해대는 총질도 문제지만, 내 주변의 타인들을 뜬금없이 관통해나가는 무수한 총알들 때문에, 그 죄들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고난을 겪는다. 그 죄들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자주 아프다.

 

죄의 새끼들이 죄의 새끼들을 낳는다.

오로라를 스쳐 간 연어 떼가

온 하늘을 붉은 밀키웨이로 만들고

어느새 사라졌다.

 

나는 내가 진 죄를 생각하느라 바빠,

오늘은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먹고 먹어 오직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인 것들은 죄가 없다.

배도 고프지 않은데 총질하는 것들이 문제다.

내게서 빠져나간 무수한 총알들 때문에

나는 아픈 거다

두 달 전에 자식을 앞서 보내고

건강을 위해 오메가 쓰리를 찾는

노인과 나는 타협해야한다는, 인생이 나는 싫은 거다.

 

정사를 끝낸 연어 떼가 강물에 즐비하구나.

자신도 모르는 욕망을 다 털어낸 저 붉은 죽음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듯이

나는 나의 죄를 직면할 자신이 없다.

다 쏟아낸 저것들은 얼마나 황홀할까.

얼마나 위대한가 제대로 쏟지도 못하면서

죄의 시궁창에 있는 것들이 딱한 거야.

그래도 생각해보면 꽃들은 그분이 주신 선물이지

쌍계사 벚꽃 십리 길을 머리 텅텅 비운 채

낄낄거리며 걷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어.

다 쏟아내고 싶어.

 

벚꽃 십리에 내장을 다 털어낸 후

다시 만날까, 우리

 

-오민석, 「쌍계사 벚꽃길의 연어떼​」(『현대시학』 2018년 5~6월호)

 

“두 달 전에 자식을 앞서 보내고 건강을 위해 오메가 쓰리를 찾는 노인과 나는 타협해야 한다”면 그것은 아픈 일일까. 그러나 그것이 생명의 원리이다.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인간화’되지는 않았지만, 기계적인 것 같지만,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생명의 의무요 어쩌면 미덕이다. 그런데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오메가 쓰리나 찾는 노인과 나의 인생이 싫어질 때가 있다. 투박하지만 장엄한 자연의 생명 윤리와 세밀하지만 비소(卑小)한 인간의 생명 윤리가 비교될 때 특히 그렇다. 욕망을 다 털어낸 연어 떼의 저 붉은 죽음을 보라. 저 죽음은 생명에 반하는 죽음이나, 죽임이나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니다. 새로운 생명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장엄한 죽음이다.

 

연어 떼가 다 쏟아낸 원초적 본능으로서의 욕망 발산의 현장은 얼마나 처연하면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욕망은 너무 초라하고 타락한 것이 아닌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도 욕망이랍시고 타자에게 무수히 총질을 해대면서도 자의식은 있어서 ‘죄의 시궁창’ 속에만 처박혀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진 죄를 생각하느라 바쁘고 그 죄를 직면할 자신”도 없어서 죄의 시궁창 속에만 처박혀 동맥경화의 증세를 보이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소모하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 죄의 시궁창에서 빠져나와 “쌍계사 벚꽃 십리 길을 머리 텅텅 비운 채 낄낄거리며”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은 허허롭기도 하고 욕망을 다 쏟아낸 연어 떼처럼 아름답기도 하다. 그렇게 하늘까지 닿을 벚꽃길을 따라, 그리도 고운 꽃빛깔들을 보면서 걷다보면 우리는 잠시라도 우리의 생명에게 안도와 휴식을 줄 수 있으리라.

 

죄의식의 근원을 생각해보면,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느냐 그렇지 않으냐, 생명을 아프게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죄의 유무가 결정되는 듯하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원초적 본능으로서의 자기방어 기제를 지니고 있다. 어떤 생명에 위협이 닥쳐오면 그 생명체는 막고 피하고 움츠리다가 그래도 안 되면 목숨을 걸고 자신을 위협하는 대상과 사투를 벌인다. 태아는 물론 식물들조차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까 ‘나’를 아프게 하는 것, 생명이 있는 모든 ‘나’들을 아프게 하여 ‘생명’을 일그러뜨리려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죄악인 것이다. 그 죄들로 인해 너와 나의 가슴팍이 파였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는 죄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전하느라 타인을 아프게도 하고 스스로 아파하느라 여념이 없다. 더욱이 죄의 새끼들이 죄의 새끼들을 낳듯이, 때로는 지은 죄와 그 죄의 용서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과(謝過)가 소용돌이를 일으켜 또 다른 죄를 낳기도 한다. ‘사과의 새끼들이 낳은 사과의 새끼들’ 속에서 우리의 가슴이 파이기도 하는 것이다. 나에게 지은 죄 때문에 네가 나에게 사과 한 알 휘익 던지듯 던진, 사과 같지 않은 사과 때문에 내 가슴팍을 내가 치게도 되고 그 진의(眞意)가 의심스러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다. 그럴 때의 사과는 또 다른 죄와 그에 따르는 벌을 낳는다. 사과가 오히려 돌이 되어 나의 심장으로 날아드는 것이다. 그 돌은 타인에게는 어떤 이유에서는 백합이 되기도 하겠지만 급기야는 석유가 되고 또 다른 타인의 가슴에서 불길로 솟구치기도 한다. 어찌 해야 하나, 그 사과를 깎아 먹어야 하나, 다시 돌려주어야 하나. 우리는 끊임없이 이 갈등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상징으로서의 큰 인간 A는 생명이 던져놓은 상징으로서의 큰 윤리나 큰 도덕의 강물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거나, 상징으로서의 큰 죄악에서 낄낄거리며 빠져나올 수도 있겠지만, 우리처럼 작은 인간 a, b, c, d, f들은 백합의 향기에 취하거나 불길에 휩싸일 수밖에는 없다.

 

이것은 돌이 된다

 

작은 인간 b의 가슴이 파인다 돌에 맞은 b는 애초에 사과일리 없지 사과일리 없지 가슴팍을 치며 c를 본다 사과는 사과로 출발하지조차 못했다 사과조차 사과로부터 출발하지 못한 사과는 c의 가슴에 백합을 피우기도 하고 d의 가슴에 석유를 뿌리기도 하고 f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

 

너는 사과를 만질 수 없다.

나는 사과를 깎으려는 손가락을 접시 위에 올리지 못한다.

 

주워 담아지지 않아 주워 담을 것이 없는

 

돌이기도 백합이기도 석유이기도 불이기도

사과는 돌을 먹는다.

사과는 백합을 먹는다.

사과는 석유를 마신다.

사과는 불을 마신다.

 

팽창하는 사과 폭발하는 사과

사과답지 않은 사과

 

사과과사사과과사사과과사사과과사사과과사사과

사과과사사과과사사과과사사과과사사과과사사과

 

원하는 사과가 되지 못해서

 

나는 죄 지은 사과과사 / 너는 죄를 모르는 사과과사

b의 사과과사 d의 사과과사 c의 사과과사 f의 사과과사

 

죄 많은

 

a의 지구

 

- 금은돌, 「a가 사과를 던지면」(『시인광장』 2018년 6월호)

 

그러니까 때로는 우리처럼 뼈와 살을 지니고 죄의 시궁창 속에서 삶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작은 인간들의 사과는 팽창하지 않을 수 없다. a의 사과가 f의 불을 마시고 f의 불이 (h)의 돌을 먹고 (h)의 돌이 (k)의 사과가 되리니, 그렇게 사과는 우주처럼 팽창할 수밖에는 없다. 혹은 팽창하다가 또 우주처럼 폭발하여 원하는 사과는 되지 못하고 도리어 ‘사과과사’라는 해괴한 죄목으로 변질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죄를 짓고 사과하고, 사과는 되지 못하여 다시 죄가 되니, 사과 받은 자가 다시 죄를 짓게 되고 죄 지었던 자는 죄를 모르고, 백합이 돌이 되고 돌이 불이 되고 불이 석유가 되고 석유는 사과가 되고 사과는 또 돌이 되고 돌은 사람이 되리니, “송수신 이탈 지역을 넘어 손발톱 다 닳을 때까지” 죄가 많기도 많은, 그래서 그만큼의 벌도 많기도 많은 a의 지구인 셈이다.

 

사실 이 많은 죄와 벌들은 생명이 다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아프지 않으려고, 아프지 않아서 마침내 생명을 살리려고 갖은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안쓰럽고 또 얼마나 애잔한 일인가. 작은 인간들을 하나하나의 소우주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또 얼마나 위대한 일이기도 한 것이겠는가.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프로그램된 기계적 생명윤리뿐만 아니라 인간화된 생명윤리가 필요할 듯싶다.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이 죄가 아닌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생명만 유지하려고만 한다면 죄가 된다는 윤리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생명을 살리려는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죄악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사람살이라는 것이 풀잎 같아서 이 바람에 휘둘리기도 하고 저 바람에 휘둘리기도 한다는 것을, 그렇게 매번 흔들리면서 죄도 짓고 벌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서로가 인정해줄 수는 없을까. 끝날 것 같지도 않은 어두운 골목길을 함께 걷고 있는 것이라는 마음을 서로 나눌 수는 없을까.

 

꽃잎들 자세히 보면 사람 혈관 같네.

그 길이 합치면 하늘까지 닿겠네.

그래서 꽃빛깔 그리 고왔구나.

착한 지아비와 지어미처럼 수고 많았다고 서로를 토닥이네.

 

돌아보면 그 여정 풀잎이네.

제 몸의 몇 배를 돌아서 늙은 손으로 다시 보듬는 봄뜰

상처도 꽃순으로 아물었네, 설령 열매 없어도 아직 뿌리가 숨을 쉬지

잔뿌리 숨어있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밤이면 아침이 아득했어

그 수맥 파기, 씨앗부터일까 그 이전일까.

어두운 골목길 끝날 거 같지 않았어, 송수신 이탈 지역까지

손발톱 다 닳을 즈음 당신 앞에 반짝이던 잎맥이여.

 

아으 동동, 봄비가 동맥경화의 혈관을 토닥이듯

힘겹게 걸어온 우리의 안녕이 서로의 안녕을 쓰다듬는

짧은 봄이라네.

 

- 김유선, 「우리의 안녕」( 『시인광장』 2018년 4월호)

 

그러므로 우리의 윤리는 착한 지아비와 지어미처럼 수고 많았다고 서로 토닥여주기, 돌아보고 또 앞서 보아도 우리가 가는 길들에는 모두 풀물이 들어 있어서 시퍼렇게 멍들 수밖에 없는 마음이지만 그 마음으로라도 다른 멍든 마음들을 감싸주기, 총질을 해대면서 또 되돌아오기도 하는 그 총알을 맞으면서 제 몸의 몇 배를 돌고 돌아 다시 보듬어보는 봄뜰처럼 얼어붙었던 풀잎에게 따듯한 손길을 건네주기, 사과 같지 않은 사과로 상처 난 마음에 꽃순을 피워주기, 설령 그 모든 노력들이 다시 총알이 되고 사과과사가 된다 할지라도 사람의 뿌리를 버리지 않기, 그 뿌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리기, 그 뿌리의 숭고한 수맥파기는 씨앗보다 그 이전 그 이전보다 더 이전이라고 장담해두기, 그 뿌리가 그리도 고운 꽃빛깔을 위해 송수신 이탈 지역까지 손발톱 다 닳도록 장엄하게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서로 위로해 주기, 또 설령 그 뿌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할지라도 서로의 안녕을 기원해주기, 바로 옆에 있는 내 주변의 안녕부터 살펴보기

 

김명철(시인,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