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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추인 시인 / 비오는 날의 산조(散調)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3.

김추인 시인 / 비오는 날의 산조(散調)

 

 

  누가 오시는가

  뉘 우현금(雨絃琴)을 뜯으며 오시는가

  서천으로부터 찰방찰방 건너오고 계시는가

  파문 지는 둥근 발소리 물 내 난다

  깊어지다 빨라지다 이윽고 숨을 죽이듯 적막하게 닿는 비

  주렴으로 선 수직의 현들 있다

  빼곡히 선체로 목이 메는 것들이 있다

 

  바람의 손가락이 뜯고 있을 비의 현琴, 비의 선율, 천상에서 지상까지 이어지는 것은

  침묵 다음의 음계다. 흐느끼듯 머금듯 삼켜지는 구음

  솨-스스흐 스흑스흑 스스

  무흐 무흐 무흐흐 무흐

  세상을 주류하는 구름아 바람아

  죄다 여기 빗속에 너희 울음을 묻은 것이냐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강물은 강물소리로 늪은 늪의 소리 결로

  어린 영혼을 쓰다듬듯

  세상을 염송하듯 듣는 이나 들으며 빗소리는 이어지고 풀어지고 가없이 반복되고 있다

  우루무치에서 내리지 못한 비

 

  투루판에서 백년 삼켜진 빗소리

  아-화염산에서 천년 머금기만 했던 빗소리의 기억으로

  짓소리* 홑소리* 끄을며 끊으며 범패 울듯 범패 음유하듯

  침묵도 소리도 아닌 소리로 남의 심금을 뜯어내고 있다

 

  비의 숲을 내다보는 직박구리도 제 노랠 잊고 빗소리에 젖어있다

 

  산밭 지나 싸리밭 지나

  은사시 나뭇잎들 짚으며

  미뉴엣 풍으로 닿는 작은 음표들의 발자국

  흩날리다 그치다 다시 날리는 울기 좋은 날의 우현금 소리를 아시는가

  들어본 적 있으시던가

  살구나무 가지 곁에 선 고요도 무채색으로 빗소리에 젖어있다

 

*짓소리 범패가운데 가사가 산스크리트어로 긴 소리. 장성(長聲)

*홑소리 ;.범패(梵唄)에서, 단성(單聲)

 

2016 한국의 예술상 특집 신작시

 

 


 

 

김추인 시인 / 고요의 음계

ㅡ 생명의 환幻

 

 

  문득 궁금해지는 고요의 깊이,

  어느 만큼 깊어질 때 임계의 음역에 깃드는 것인지

  그 떨림의 경계에서 피었을 꽃을 조우하다.

 

    꽃이 오는 경계를 생각한다.

    어느 지점에서 사물성과 생명성은 길을 달리하는 걸까.

    원소들이 염기들이 간단없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문득 목숨으로 전환되는가

    얼마나 오랜 씨알 속의 잠을 견딘 후에야 꽃으로 어린 짐승으로 지상에 오시는가.

     

    임계점에서 피어날 고요의 순결과 맑음, 그 묵음默音 속 없는

    음계를 짚어본다.

 

  미농지 빛 엷은 잠 속에서 나비를 좇는 듯 하느작이는 나울거리는 꽃의 날개짓.

 

  Bb, 판타지풍의 몽환적 고요가 꽃잎을 들어 올리고 있는 몇 초 사이

  젖비린내 헤집으며 오시는 어린 목숨을 보다.

 

  그대 물안개 하늘 오르는 해율(海律) 본 적 있으시던가.

  그 함묵의 깊이로부터 도드라져 나왔을 희디흰 배냇짓

  뭉클 사무쳐오는 젖내 아득하던 기억 있으시던가.

 

  일령 아기의 물푸레나무 잎새만 한 잠 곁.

  고요의 옷을 입은 깃 치는 소리는 그냥 희다,

  우주가 거기 계시다.

 

격월간 『시사사』 2016년 3~4월호 발표

 

 


 

 

김추인 시인 / 일반 상대성이론의 실체

 

 

   소심이 피더니 난향이 한 방 건너 두 방 건너 예까지 닿는다

 

   저들은 향의 유전자를 어디 숨겼다가 꽃에 얹어 발현시키는 것일까

   실내공기는 정지되어 있고 ‘이만치‘는 짧은 거리가 아니다

 

   향기의 미세입자가 자취 없이 날아와 내 후각세포를 건드린다?

 

   아닐 것이다 소심의 질량과 내 체 질량으로 해서 휘어지는 공간, 나와 소심화분 사이,

   그 우묵한 웅덩이 속으로 향기의 입자가 흘러들었을 따름이라고

   내 지적 호기심이 아인슈타인을 베끼고 있다

 

계간 『시와 문화』 2017년 여름호 발표

 

 


 

 

김추인 시인 / 노을을 인화하다

 

 

   갈대숲 가지런하다

   노을 때문일 것이다

   누ㅡ가 물감 통을 엎어뜨렸나

   다홍의 서천

 

   길게 펼친 수면이

   번질번질 석양에 젖을 동안

   우리는 오뚝오뚝 늘어선 몽구스처럼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모래등성이 위에서 지는 해를 보낸다

   붉노을의 중심에 시선을 박고 선

   사내들의 실루엣

   해의 심장에서 꺼낸 유서라도 본 듯 먹먹해져

   사막소나무* 뒤서서 말을 잊었더랬다

 

   발자국을 지우며 낮게 날아가는

   새 등짝이 빤득거린다

   노을을 슬쩍 바른 모양이다

 

   치명적인 아이다르의 이 그림 한 쪽

   일상이 사무치게 서걱일 때

   내 기억을 찢고 나와 부추기리라

   “떠나라고- ”

 

공저(共著) 여행집『다시 사막에서의 열흘』 (책만드는집, 2018) 중에서

 

 


 

 

김추인 시인 / 부하라*의 아침

 

 

아무도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미나렛과 모스크 사이의 간극

이와 저의 사이

망루와 기도의 사이

상징과 효용의 거리를 좁히며 나라가 민족이 문명이 섞이며 부서지며 벌어진 틈마다 모래 날고 바람 새고 끙끙대는 세상의 신음이 샌다는 것을 몇이나 기억할까.

 

어느 유적지에서도 끌과 정을 부리던 장인(匠人)의 이름자 본적 없다. 명령자와 노역자 사이 어처구니같이 낡고 있는 중얼거림만 있을 뿐, 한참 더 약아진 시장통을 돌아 나오며 무슨 일로 바보현자, 나스레딘 호자의 나귀방울소리가 못내 듣고 싶은 건지

 

억만 시간의 지층 틈바구니에 낀 내가

틈새 비집고 들온 햇빛살

손바닥에 받으며

젖니처럼 말갛게 돋던

유년의 아침을 기억해내곤 웃는다.

 

캄캄한 수 세기 전의 아침들이 설산너머에서

오래 걸어와

흙집 문턱에 어린 햇발들로 바글대는 산책길.

 

*실크로드상의 우즈베키스탄 유적도시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8년 4월호 발표

 

 


 

 

김추인 시인 / 말이 달린다

 

 

   말이 달린다, 갈기에 붙들린 바람이 말 잔등을 치며 별의 가장자리를 달리는 중이다.

  가도 가도 서(西)로 길을 내는 철새들의 허공

  한 무리의 비늘구름 사이로

  태양도 저무는 것을 보류하고 있다, 말이 달린다.

 

  바람 높고 조도 낮은 가장자리는 언제나 모퉁이들의 거주지,

  우주의 바깥으로부터 백조자리 지나 바람 치는 별의 중심을 향해

  타각타각 허공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말이 달린다.

  성단에서 성단으로 건너뛰며 오래 바라본 겉과 안처럼

  홀소리와 닿소리 한 몸으로 단단해지리라, 말이 달린다.

 

  죽어서도 모퉁이가 많은 나는 말을 부리는 시인일 것이다.

 

  언제쯤 내 말은 멈출 것인가 핏물 밴 말발굽 하나,

  기억과 잊힘 사이에서 수메르의 점토판처럼 해독되다가 말다가 하겠지만

  겉과 안 경계에서 내 말은 오오래 광야를 달리며 세상의 바람을 읽을 것이다,

  말이 달린다.

 

계간 『열린 시학』 2016년 여름호 발표

 

 


 

 

김추인 시인 / 자코메티의 긴 다리들에게

-매혹을 소묘하다

 

 

   저 소실점 바깥은 여백일 것이네

   날마다 낯선 하루들이

   날마다 날선 하루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소름 돋는 백지의 오늘을 디밀어도

   여린 것들이 날마다 행성을 떠나도

   방싯

   그대가 스스로에 말 걸어주는 것은

   비밀한 주소쪽지 하나 움켜쥔 때문이네

   오늘은 아니라도

   술패랭이나 혹등고래의 노래가 닿을

   여백의 너머에 있을 그 곳

   그 신신한 주소는

   그대, 햇살매단 자전거 바퀴살 씽-씽-

   달려 나갈 눈부신 그곳

   내일이라는 이름

 

   기다림이란 절대 고독의 walking man*

   걷고 또 걷네

 

   *자코메티의 브론즈 작품(1948)

 

월간 『월간문학』 2017년 9~10월호 발표

 

 


 

 

김추인 시인 / 자벌레

 

 

   실크로드 중간거점 사마르칸트는 우즈벡의 푸른 오아시스.

 

   비단이 오가던 길이라선지 포플라인가? 들여다보면 뽕나무네!

   포플라 잎사귀만한 뽕잎 보며 지출을 줄이는 나무의 사막살이를 본다 싶은데

   아흐- 오백 살도 더 늙었을 거대뽕나무 고목의 우듬지가 궁금했던 걸까.

 

   아득한 높이를 향해

   쉼 없이 허리를 구부렸다 펴는 자벌레를 보네.

 

   롯데타워, 아스라한 높이에 매달려 고물거리던 벌레 한 마리 생각나네

   별박이노랑자나방 유충만 같았는데 맨손으로 빌더링에 골몰하던 여제*는

   유리벽 위에서 허공을 틀어쥔 것이 내 눈엔 형광펜자국 같은 자벌레였지 아마

 

   여직도 뽕나무 고목 위, 구부렸다 폈다를 궁구하는 자벌레를 보네.

   오르고 재는 일이 미심쩍은지 이따금 멈춰 좌우 머리를 내두르곤

   다시 자(尺)질을 하네.

 

   마지막 높이의 뽕잎으로 세상에 없는 실크라도 뽑을 듯이

 

공저(共著) 여행집『다시 사막에서의 열흘』 (책만드는집, 2018) 중에서

 

 


 

김추인 시인

경상남도 함양에서  출생.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위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 『오브제를 사랑한』, 공저 여행집 『다시 사막에서의 열흘』이 있음.

2016년 제9회 한국예술상 수상, 1991년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 2010년 만해‘님‘문학상작품상 수상, 2011년 서울 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6년 한국의 예술상 수상, 2017년 제8회 질마재문학상 수상. 현재 무크지 『님』 편집위원, 계간 시전문지 『포엠포엠』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