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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금숙 시인 / 모란
모란에 갔다 짐승 태우는 냄새 같기도 하고 살점 말리는 바람 내음 같은 것이 흘러오는 모란에 가서 누웠다 희게 흐르는 물베개를 베고 습지 아래로 연뿌리 숙성하는 소리를 들을 때 벽 너머 눈썹 검은 청년은 알몸으로 목을 매었다 빈 방엔 엎질러진 물잔, 물에 젖은 유서는 백년 나무로 환원되고 있었다 훠이훠이 여기서는 서로가 벽을 뚫고 지나가려한다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온다 어른이 아이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낮 같은 세상을 툭 꺼버리지 말고 그냥 들고 나지 그랬니 무덤들 사이에 아이처럼 누워 어른임을 견딜 때, 궁창의 푸른 갈비뼈 틈에서 솟는 악기 소리 먹먹한 귓속에 신성을 쏟아붓는다 슬픔이 밀창을 열고 개다리 소반에 만산홍엽을 내 오는 곳 모란에 가서 잤다 오색등 그늘 밑에서 잤다 내력들이 참 많이 지나가는 곳에서 사람의 아들, 그의 불수의근을 베고 잤다
웹진 『시인광장』 2014년 10월호 발표
나금숙 시인 / 자이르*
오늘 누가 오든지 어떻게 오든지 그것은 비다. 창밖이 수선스러워서 문을 열자 비가 먼저 와서 의자에 앉는다. 빈 새장을 기웃거리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테이블에 놓는다. 새로 산 스웨터는 비냄새를 풍긴다. 오래된 방짜유기 놋냄새를 풍긴다. 비는 극세사 담요 속으로 와서 잔다. 밟힐까봐 마음 졸인다. 비를 밟은 발바닥이 뭉클, 비는 털실뭉치처럼 뭉쳐져서 구석으로 영원히 굴러간다. 비는 택배회사가 가져오는 원통형 박스, 키가 상자보다 커서 눌러 담는다. 꼬르륵 마지막 하직 인사를 남기고 지상에서 사라진다. 뚜껑을 열자 멧새처럼 날아오르는 비, 막사발 속으로, 위패 속으로 들어간다. 비는 흘러내리는 사각형 속에서 천천히 증발하고, 오늘을 기다리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단념하고 잠이 들면 댓잎 같은, 깃털 같은 비가 온다. 너무 친밀해서 있는지도 모르는 내 속의 숨처럼 비는 항상 온다. 있는지도 모르는 당신처럼 온다. 오지 않는다. 내일 올 것이다. 육체가 없어도 남는 영혼처럼, 사랑처럼. 마른 땅을 보려고 높이 날아간 새처럼.
*자이르의 아랍어적 의미는 <명백한>,<가시적인>이다.이슬람교에서 알라(하느님)의 한 속성으로 규정되고 있다. 작가 보르헤스의 단편 제목이기도 함
월간 『유심』 2013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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