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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수빈 시인 / 질문의 도서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3.

박수빈 시인 / 질문의 도서관

 

 

  칸칸마다 합장하듯이 서 있는 책을 펼치자

  주르르 흐르는 손금의 문장들

  내 천(川)인가 갈 지(之)인가

  어느 여울목에서 당신과 합수를 이루고

  흘러가는 구름을 사랑하고 말았다

  당신이라는 주어의 문장에 밑줄 긋는 마음

  코를 박으며 빛나리라 여기던 꿈의 이마

  활자들이 물 위를 떠돈다

  구름은 구름이라서 구름처럼 사라지고

  순간은 순간이라서 순식간에 살아난다

  구름의 은유 속 아득한 너와 나

  우리는 서서히 낡아가는 기도문

  꽂혀 있는 구름을 다시 집어든다

  생은 어느새 행간 밖

  나는 외출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서(司書)

  술어들은 말줄임표를 낳고

  접힌 귀는 스스로 펴지지 않는데

  내 가슴만한 페이지를 넘기기에 100년이 채 안 걸린다

 

격월간 『시사사』 2016년 3~4월호 발표

 

 


 

 

박수빈 시인 / The winner takes it all

 

 

칸나와 맨드라미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서로 노려보는 사이 사람들이 모여든다 무너진 축대 옆에 잡초는 우거지고 말복이 합세를 한다

 

칸나가 긴 팔을 뻗어 펀치를 날린다 쓰러지는 맨드라미, 귀때기가 붉게 엉겨 문드러져 있다

 

후텁한 바람이 철썩 달라붙는다 두 눈을 희번덕인다 다리까지 피가 흐르고 분노지수만큼 돌격 앞으로

 

작은 몸에 언제 뜨거운 시간들을 새겼나 맨드라미에게 인내는 마른 걸레를 비틀 듯 가슴을 쥐어짜는 것, 몸을 휘청이며 밥주걱처럼 내리친다 걷어찬 살이 이렇게 찰질 줄이야, 근육이 드러날 정도로 핏물이 튄다

 

글러브를 끼지 않고 로프도 치지 않은 JS 관리 프로젝트 현수막이 펄럭인다

 

덤프트럭소리 포크레인 자국, 흙이 날린다

평화는 녹다운되었을 때만 온다 맨드라미가 바람을 가르며 어퍼컷을 날린다

 

계간 『시와 반시』 2015년 겨울호 발표

 

 


 

박수빈 시인

전남 광주에서 출생. 2000년 《문학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달콤한 독』,  『청동울음』과 평론집 『스프링 시학』이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이며 상명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