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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겸 시인 / 청춘 극장
스피링이 떨어져 나간 앨범에는 옛 흑백사진들이 색이 바래있네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들과 안면도로 캠핑을 갔던 추억의 사진들 육교가 없던 시절이라 광천항에서 배를 타고 섬의 남쪽 고남항에 도착했지 「바람아래」해안가에는 사람의 발길이 없는 야생 해변과 높은 파도가 있었지
모닥불이 있는 텐트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는 선배 여기자의 친구였던 똑똑한 여자의 모습 문학과 철학의 책들로 말이 통했던 여자 일 년 선배였지만 귀부인을 경호하는 흑기사처럼 옆에 있고 싶었네 불량기가 있는 토착청년들이 막소주를 들고 와서 강제로 같이 놀았던 기억
여학생들이 있는데 시비가 벌어지면 어떡하나 마음 졸이던 기억
언제 한번 집으로 놀러오라는 초대를 정말로 받아들인 쑥맥이었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찾아가니 아버지는 야당을 지지하는 반골기질의 늙은 목사 저녁식사 내내 유신시국에 대한 훈계와 예수님 설교를 들었지 내가 기독교로 개종해야만 딸과 만날 수 있다는 암시도 함께
하늘의 별들과 파도소리가 있던 해변의 문학소녀는 누가 훔쳐갔는지 기독교를 통해 내 영혼을 구원하려는 잔다르크의 신념에 찬 여자만 있었네 기독교에 대해,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제롬과 알리사의 선택에 관해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네
몬테규가의 로미오는 종교적 배경이 너무 다른 캐플릿가의 쥴리엣에게 마음의 상처만 입고 돌아왔네
원자력연구소에 직장을 잡고 몇 년 만에 연락이 와서 다시 만났던 추억 전도사가 되거나 목사의 부인이 되었으려니 했던 여자는 병자의 모습 내 앞에는 허난설헌 같은 감성의 여자대신 감정의 변화가 심한 히스테리칼한 모습 한 살 어린 나를 남자로 기억했던 것일까 이상한 감정 속에 서로가 특별한 존재였던 그 때 그 순간을 기억했던 것일까 시간의 주름에 아홉 폭 병풍처럼 접힌 옛날의 긴 대화가 마음에 남아있었던 것일까 나를 쇼팽처럼 생각하는 조르주상드의 천재와 기지가 있었지만 불안한 대화와 비약하는 생각들의 날카로움이 낯설고 두려웠지
삼십년이 지나 학보사 모임에 온 선배기자에게 옛 친구의 소식을 물었네 선배는 친구가 정신분열로 병원에서 일찍 죽었다는 대답과 함께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네 그 때 김백겸씨가 좋아했나요? 나는 웃고 말았지만,
옛날 바닷가 흑백사진에는 츄리닝을 입은 그 여자의 초롱초롱한 눈매가 있네 순간의 기억들이 얼어붙어서 만년 빙하처럼 단단해진 영원이 있네 신사임당이 치맛자락에 그린 먹 포도가 썩지 않는 향기를 발하는 순간처럼 내 안의 청년이 썩지 않는 치아를 드러내 웃고 있는 모습이 있네 청춘의 검은 눈동자가 세파에 늙은 내 모습을 보는 역전逆轉이 있네
기억은 시간의 육체 투탄카멘의 황금가면처럼 과거는 현재로 손을 내밀어 불사의 아름다움과 악수하고자 하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5월호 발표
김백겸 시인 / 죽음 앞에서
세월이 더 흐르면 몸이 쇠약해지겠지 그럼 노인병원이나 요양원으로 가겠지 거기서도 시를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시인의 길을 계속 걸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시를 쓸 수 있다면 아마도 나는 행복한 인생을 살다가는 것이겠지
오작교를 건너가면 하늘의 초승달 같은 창백한 표정의 염라대왕이 묻겠지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시인입니다
계간 『동서문학』 2018년 봄호 발표
김백겸 시인 / 영혼의 약국
코린트 식 기둥이 있는 옛 그리스 도서관 현판은 '영혼의 약국' 소크라테스의 지혜가 적힌 양피지 책들은 인간의 무지를 치료했었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보여주는 인터넷 프로그램은 구글 크롬crome 바다지식은 인간의 영혼을 익사하게 한다
눈과 귀를 닫아 좌망坐忘에 든다 인간의 유한지식은 사라지고 무한 적멸 어둠이 등불을 켠다 이 불빛을 따라가면 하늘로 가는 계단 입구가 나올까 죽음이 열쇠인 천국의 문이
계간 『동안』 2018년 봄호 발표
김백겸 시인 / 바람의 언덕
맵시가 날렵한 풍력발전기는 비천(飛天)을 원하는 로봇선녀 같구나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람을 몰고 도착한 허황후의 타임머신 배 같구나 김수로왕 72세 손(孫)인 내 목숨에 첫 키스의 낙인을 찍은 그날의 남해바다처럼 구만리 밖, 검푸른 시간이 흘러가는 바람의 언덕
바람에너지가 흘러가는 저녁하늘을 바라보다가 하이 빔beam 키고 내려왔지 시퍼런 불빛을 현재의 어둠에 뿌리면서 배고픈 호랑이처럼
계간 『동안』 2018년 봄호 발표
김백겸 시인 / 수금(竪琴)
저녁하늘은 불바다 초나라 장왕의 밤 사냥을 위한 엽화(獵火)같기도 하고, 네로황제가 시의 영감을 위해 태운 로마 화재 같기도 했네 황혼, 시간의 틈에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위해 지옥으로 가던 문이 있었지 나는 수금竪琴을 들고 장엄한 순간을 노래해야 할까 구름에 핀 백만 송이 장미꽃밭을
계간 『서정과 현실』 2018년 봄호 발표
김백겸 시인 / 들판의 백합
솔로몬의 영광보다도 들판의 백합이 아름답다고 시인 예수는 말했지 백합을 피워낸 힘의 질서는 언제 어디서나 빅 데이터의 프랙탈fractal처럼 피어있다 화가가 그-영원한 얼굴을 그려내려 할수록 그-영원한 얼굴은 화가의 붓으로부터 빠져나가 하늘 구름이나 바람으로 흘러간다 백합은 스스로 아름다움을 모른 채 피어있다 백합은 그-영원한 얼굴이 모든 힘과 지혜를 기울여 쓴 한권 마법서처럼 피어있다 저 들판, 백합 꽃잎이 몇 번이나 떨어져야 내 공부는 끝이 날까
계간 『시와 시학』 2018년 봄호 발표
김백겸 시인 / 알고리즘이 알고리즘을 치료한다
유성 선병원 치료시스템은 생체복구 알고리즘 의사와 간호사, 환자들은 시스템 회로에 갇혀 회전목마처럼 순환 한다 인간의 고장 난 회로수리를 위해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거대 공장 뇌혈관센터 6박 7일 입원은 UFO 기술 견학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손상된 뇌세포 판독을 위해 MRI는 사진을 찍는다 UFO가 하늘에서 착륙하듯이 MRI 모터는 웅웅웅 돌아간다 첨단기계알고리즘이 생체 알고리즘을 판독한다
현생 문화인류를 외계인이 설계했다는 가설이 맞다면 의술도 UFO 선생님들이 전달한 수리기술이겠지 자신들이 유전자개량으로 창조한 인간원숭이를 보존하기 위한 기술
의술의 시조 헤르메스 지팡이에는 뱀 두 마리가 서로 꽈리를 틀고 있다 유전자 이중나선 사슬을 상징하듯이 유전자 복제와 교배공학 지혜를 은유하듯이 신들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기록한 창세기의 기록을 증거하듯이
외계인들이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는 구약기록에 따르면 외계인들은 인류 정신건강에도 관심이 많다 그들의 설계를 벗어난 인간에게는 교화를 위해 특명전권천사를 파견하기도 한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세례를 내리거나 노아홍수로 불량제품을 쓸어버리기도 한다
인류에게 의술이라는 UFO 손상복구 알고리즘이 있어서 인간 알고리즘을 수리한다는 상상은 즐겁다 1급 자동차 정비 공장이 교통사고 페라리를 수리하듯이 교회와 사원의 비전(秘典) 의술들이 인간정신을 하늘의 매뉴얼대로 교정하듯이
알고리즘algorithm: 주어진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 방법, 명령어들을 묶은 집합. 여기서는 인간도 AI나 로봇처럼 제작 대체가능한 프로세스의 집합이라는 의미로 썼다.
계간 『동서문학』 2018년 봄호 발표
김백겸 시인 / 금강에 물거품들이 둥둥
눈 감고 거실 소파에 누워 있으니 옆집이 벽에 못을 박는 망치소리 장모님이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면서 내는 그릇소리 침묵이 아파트 벽속에서 벌레처럼 기어 나오는 소리 내 심장의 발작성 심방세동이 과속 기관차처럼 달려가는 소리 혈전이 모세혈관을 막는 소리 혈전용해제 엘리퀴스가 119 소방차처럼 달려가 불을 끄는 소리
눈이 불편해지자 귀가 예민해지면서 몸 안의 신기(神氣)는 변통(變通)의 구멍을 찾아 어둠 속을 걸어다닌다 크레타의 미궁으로부터 탈출하는 테세우스처럼,
캄캄한 마음이 햇빛이 환한 세상으로 올라가는 발자국 소리 유리창 흔들림이 바람의 물줄기를 따라 먼 세상으로 흘러가는 소리 아내가 금강에 방생한 메기 떼가 푸른 물속으로 헤엄치는 소리 메기 떼가 헤엄친 시간들이 명주실처럼 이어지면서 내 수명이 늘어나는 소리
(내가 부정맥 혈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유성선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자 놀란 아내는 인생상담 과외선생에게 응급 처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왕이면 알 밴 암컷 메기들을 사서 방생하지 그랬어" 농담을 건넸지만 내 목숨이 메기 떼가 헤엄친 거리에 달렸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
메기의 목숨을 품은 금강은 세종시 부강면 매포역을 돌아 흘러나간다 금강하구언을 지나 서해 검은 바다까지 흘러나간다 백년 후, 처방의 주력(呪力)이 끝난 후에도 금강은 세차게 흘러나간다 시간의 심연으로 사라지는 목숨들의 물거품을 둥둥 띄워서
계간 『시담』 2018년 봄호 발표
김백겸 시인 / 엘리자베스 비숍의 연인
「엘리자베스 비숍의 연인」의 원 제목은 「reach for the moon」 「달을 향해 손 뻗기」라고 직역해야 하나 「불가능을 꿈꾸기」라고 의역해야 하나 은유가 부담스런 배급사는 레스비언 시인의 부자건축가 브라질 연인을 직접 지칭했구나 플리처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유명시인이 된 엘리자베스 비숍을 연기한 미란다 오토의 섬세한 모습과 강렬한 남자성향의 글로리아 피레스의 정열을 대비한 영화
사랑에 눈먼 부자 애인도 둘만 하네 부서질 듯 가냘픈 정신의 시인 애인을 위해 집필별장을 지어주고 온갖 재정지원을 하니까 자본시대의 시인성공에는 물질도 중요하다지 서로 세컨드를 두는 바람기도 줄거리의 복선, 시인이 아닌 부자건축가 애인이 사랑에 절망해서 자살하는 영화
레즈비언 버지니아 울프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던가 여자 시인하고 결혼안하기를 잘했지 불안한 정신의 비약과 감정의 고조가 멋진 비유와 독창 상징을 만들어내지만 현실생활까지 훌륭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배경시 「한가지 기술」은 훌륭한 시라는 생각이 드네 영화 관객들에게는 한 때의 경구로 인생 관객들에게는 두고 두고 아픈 상처로
계간 『시담』 2018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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