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화 시인 / 붉은 나무들의 새벽
외로움은 등이 슬픈 짐승이라서 작은 어둠에도 쉽게 들킨다
계절을 짊어지고 나무들이 온다 겨울은 살짝만 기대도 쉽게 무너지는 마음이라 오래 켜 둔 슬픔 위로 폭설이 쌓인다 네가 건조한 바람으로 불어올 때 창문은 피폐해진 마음들의 거처, 새벽노을이 드리운 나무들은 서서히 붉게 물들고 창 위로 서린 시간의 두께만큼 오늘은 흔들린다
창 위에 적은 이름처럼 사라져가는 안부들
나무들은 어둠에 뿌리 내리고 빛을 향해 나간다 바다를 건너서 북쪽으로 향하면 얼음과 죽은 자들의 나라가 있다는데, 그 입구를 지키고 있는 짐승은 노을로 물들여진 가슴이 언제나 붉다
고독한 몸이 보내오는 눈빛에서는 오래 짓무른 어둠의 냄새가 난다
몸 속에 그늘을 새기는 방식으로, 매일 복용해야 하는 일정량의 고독과 슬픔이 있어 나무는 스며든 간밤의 흔적을 나이테로 새겨 놓는다 새벽을 견디고 있는 이름들의 빛으로 나무들은 못 다 쓴 계절들을 천천히 옮겨 적는 중이다
계간 『시산맥』 2017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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