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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용화 시인 / 붉은 나무들의 새벽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1.

정용화 시인 / 붉은 나무들의 새벽

 

 

외로움은 등이 슬픈 짐승이라서

작은 어둠에도 쉽게 들킨다

 

계절을 짊어지고 나무들이 온다 겨울은 살짝만 기대도 쉽게 무너지는 마음이라 오래 켜 둔 슬픔 위로 폭설이 쌓인다 네가 건조한 바람으로 불어올 때 창문은 피폐해진 마음들의 거처, 새벽노을이 드리운 나무들은 서서히 붉게 물들고 창 위로 서린 시간의 두께만큼 오늘은 흔들린다

 

창 위에 적은 이름처럼 사라져가는 안부들

 

나무들은 어둠에 뿌리 내리고 빛을 향해 나간다 바다를 건너서 북쪽으로 향하면 얼음과 죽은 자들의 나라가 있다는데, 그 입구를 지키고 있는 짐승은 노을로 물들여진 가슴이 언제나 붉다

 

고독한 몸이 보내오는 눈빛에서는

오래 짓무른 어둠의 냄새가 난다

 

몸 속에 그늘을 새기는 방식으로, 매일 복용해야 하는 일정량의 고독과 슬픔이 있어 나무는 스며든 간밤의 흔적을 나이테로 새겨 놓는다 새벽을 견디고 있는 이름들의 빛으로 나무들은 못 다 쓴 계절들을 천천히 옮겨 적는 중이다

 

계간 『시산맥』 2017년 겨울호 발표

 

 


 

정용화 시인

충북 충주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전문가 과정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석사과정 졸업. 2001년 월간 《시문학》을 통해 등단. 200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흔들리는 것은 바람보다 약하다』가 있음. 현재 안양 여성문학회 회원. 좋은시문학회 회원. 민족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