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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현형 시인 / 이브레아까지는 너무 멀다*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5.

권현형 시인 / 이브레아까지는 너무 멀다*

 

 

  너는 창백하지 않아 소나무 유령아

  가파름을 넘는 힘은 어디서 오나

  금관에서 흘러오는 목소리를 멀리서 들으면

  아득해진다 야간 기차를 탄 기분으로

 

  밤의 공기가 달착지근해진다

  창문 가까이 트럼펫 가까이 하숙하며 지내던 그때

  햇볕이 사라진 골목에 자주 사로잡혔다

 

  빛과 어둠 사이 은밀한 시샘으로

  반대편의 취향과 언어로 끝없이 구애한 적 있다

  피아노를 치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던 손가락을

  편지 쓰는 일에만 바친 적 있다

 

  한 자루에 다 담을 수 없는 솔방울 향기를

  탐닉한 사냥꾼은 시간에 빠진 사랑이었을 것이다

  발바닥 가운데까지 심장이 박혀 있던 나이

 

  터키 원석 세공사나 색감 좋은 원단의 이름을 부르듯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던 저녁과 함께

  너와 함께 전력으로 걸어왔다, 창백한 소나무 유령아

  온종일 낙숫물을 받았던 네 손바닥에서 녹내가 난다

 

  너는 언젠가 날아다닌 적이 있을 거야

  증표처럼 남아 있는 수많은 잔 날개들

  수많은 초록 바늘들, 가파름을 넘는 힘은 어디서 오나

  눈이 내리면 밖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하던 우리들의 습관

 

* W. G. 제발트

 

계간 『포에트리 슬램』 2017년 가을호 발표

 

 


 

권현형 시인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 졸업. 1995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중독성 슬픔』(시와시학, 1999),『밥이나 먹자, 꽃아』(천년의 시작, 2006),『포옹의 방식』(문예중앙, 2013)이 있음. 제2회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 현재 추계예술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