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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우대식 시인 / 뒤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5.

우대식 시인 / 뒤편

 

 

  철암역에 내렸다

  흑백사진들이 서있다

  건너편 길가 드럼통에서는 화톳불이 오르고

  뒤편이 절경인 읍내

  철주 하나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금강산 보덕암이

  읍내 뒤편에는 수두룩하다

  위태한 경계에 선방들이 늘어선 것이다

  검은 배경,

  생각을 아무리 모아도 빛이 보이지 않는 마을

  생각이 몸이 되어 타오르면

  잉걸불이 되는 철암마을

  눈이 내린다

  불꽃이 튄다

  백악기에 솟아오른 검은 생명들이 수마노탑을 도는 저녁이다

  침잠이라는 말이 이렇게 어울리는 곳은

  지상 어디에도 없다

  이 배경에서 공산주의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다방 아가씨 붉은 머리띠가

  별처럼 솟아오르고

  눈은 여전하다

  긴 철로가 뻗은 길까지가 사람이다

 

계간 『시와 사람』 2010년 여름호 발표

 

 


 

 

우대식 시인 / 철창

 

 

  사선(斜線)의 철창을 몸 안에 박았다

  살을 헤집고 철창을 박은 다음

  콘크리트를 개어 발랐다

  살 속으로 스미는 짠물

  몸 안에 완연히 빛나는 철창을 부여잡은

  두 손이 있다

  아직 덜 굳은 철창을 흔들 때마다

  명치끝이 아프다

  어느 순간

  손이 사라진다

  검은 몸 어딘가로 서서히 떨어지는 손이 있다

  완강한 강물소리

  혹, 녹슨 망치소리

  어떤 관념과도 면회가 금지된 날

  다시,

  철창을 부여잡으려는

  검은 손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계간 『시와 사람』 2010년 여름호 발표

 

 


 

 

우대식 시인 / 꿈

 

 

꿈을 꾸었다. 두 눈이 멀어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꿈. 문득 아내도 아이들도 없고 지팡이 하나만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누가 내 손에 이것을 쥐어 주었을까. 혹 나를 버리며 건넨 마지막 위무의 선물은 아니었을까. 눈이 먼다는 것은 깊은 슬픔이었다. 말을 건네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산동지방의 방언 같기도 하고 깊은 산맥에서 울려나오는 잔향 같기도 하였다. 차라리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으면 바라기도 하였다. 옹달샘에 이르러 찬물로 목을 적시고 바위에 앉아 있을 때 새 한 마리가 날아가며 어깨를 툭 치기도 하였다. 눈이 먼 내가 눈을 감고 어느 먼 봄날의 평화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낡고 화려한 문양의 천을 걸친 늙은 여자가 내 몸을 지나갔다. 천산 산맥이 하얗게 보이는 천막 밖에는 포도가 부드럽게 가지를 뻗고 바람은 나를 일으켰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꿈속에서 내 이름이었다. 누군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살아야 한다. 지팡이를 짚고 벌떡 일어서다 잠이 깬 음력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신발을 신은 채였다.

 

계간 『시와 사람』 2010년 여름호 발표

 

 


 

 

우대식 시인 / 내 안의 겨울, 三冬을 찾아서

 

 

내 안에도 三冬이 있어 펑펑 눈이 쏟아지는 진부 골짜기에서 다시 나를 만났을 때 붉게 언 손도 못 내민 채 쓸쓸히 쳐다보기만 하였다. 겨울을 찾아 헤매던 어느 여름날 나는 임계 장터의 각다귀이거나 봉평 냇가 여울목 쏘가리이기도 하였다. 차디찬 겨울은 눈 속에 묻혀 보이지 않고 아무르 강까지 찾아간 발걸음은 허탕이었다. 하루 종일 멱에 지친 등짝 까만 사내아이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나의 무지는 병이 되었다.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즈음 허파 속에서 강력한 눈보라가 일어나 허름한 방에 나를 눕혔다. 가물거리는 백열등 아래 차디찬 방바닥에 몸을 묻으면 하나의 환영(幻影)이 다가오다 사라지곤 하였다. 내 안의 겨울, 三冬은 반갑지도 슬프지도 않은 사내의 형상으로 진부 골짜기 허름한 방에 불쑥 들어와 한참을 바라보다 눈보라와 함께 사라졌다. 이미 멀리 겨울까지 도달한 내 몸을 느낄 수 있었다. 봄으로 가는 모든 회로를 끊은 채 하늘 높이 눈이 쌓여가는 三冬 아래 잠들 것이다.

 

계간 『시와 사람』 2010년 여름호 발표

 

  


 

우대식 시인

1965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 숭실대학교 졸업. 아주대학교에서「해방기 북한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 받음. 1999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천년의시작, 2003) 와 『단검』(실천문학사, 2008), 『설산 국경』(문예중앙, 2013), 요절 시인 열 명의 대표시를 모은 『시에 죽고, 시에 살다 - 요절한 천재 시인들을 찾아서』(새움, 2014)등과

 그리고 그 밖의 저서로는 『해방기 북한 시문학론』(푸른사상, 2005)과 『죽은 시인의 사회』(새움, 2006)이 있음. 현재 평택 진위 고등학교 교사, 숭실대 국문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