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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시인 / 언제나
삶은 부사(副詞)와 같다고 언제나 낫에 묻은 봄풀의 부드러운 향기 언제나 어느 왕자의 온화한 나무조각상 이마에 남겨진 조각도의 칼자국 언제나 피, 땀, 죽음 그 뒤에, 언제나 노래가
태양이 몽롱해질 정도로 언제나 너의 빛
웹진 『나비』 2009년 12월호 발표
진은영 시인 / 시인의 사랑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 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이 차가운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큰 물방울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면, 나는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빨간 우체통,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너는 참 좋을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을, 혀 위로 촛농이 떨어지는 밤을, 이 밤의 민들레 홀씨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가는 시를 네가 쓰지 않아도 좋을 텐데…
웹진 『나비』 2009년 12월호 발표
진은영 시인 / 지난해의 비밀
구름이 물방울들, 발 없는 영혼들의 몽유병이라는 거 청춘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청춘이 끝난 뒤에도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어떤 싸움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는 거 나무들, 나무들 회색 밑둥들, 저 아래로 슬픔의 기름이 흐른다는 거
인쇄소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감리 보는 사람에게 소리 없이 시가 새겨진다는 거 내가 너를 이미 떠났다는 거
봄이 오고 구름이 지나가고 꽃들이 詩를 떨어뜨리고 나무들은 버찌를 바람은 낡은 역 근처에 음악을
어느 한 줄의 문장을 읽을 무렵 붉은 윤전기가 돌아간다는 것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 어디선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아이들은 유리로 된 껌을 씹고 아 아 아 웃으며 지나가는 아가씨의 순결한 옆구리에서 창이 튀어나오고
필름을 넣지 않은 사진기의 눈빛으로 네가 풍경을, 나를 철컥철컥 찍어댄다는 거
배고픈 아이와 죽은 사람의 하얀 달을 비 갠 거리를, 핏방울을
2자가 너의 힘없는 어깨를 닮아간다는 거 싸움꾼이 잠시 후 늙어간다는 거
종이의 깊은 속에서 가래가 끓고, 그 거품들 너의 왼 빰이 오른 빰보다 따듯하다는 거 내가 네 연인의 연인을 사랑했다는 거 벼락 맞은 한밤의 나무처럼
태양이 동그랗고 노란 나뭇잎이라는 거 그래서 매일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새삼 5월을 노래할 필요가 없다는 거 1월에도,12월에도 평등하게, 사이좋게
죽음이 흰 유방 열두 개를 전부 드러낸 채 거리를 뛰어가고 뛰어갔으니
계간 『시현실』 2010년 봄호 발표
진은영 시인 / 그냥, 판도라 상자
너의 말이 낡은 소파에서 일어나 세상에서 가장 큰 기지개를 켜는 날이 있었지 나의 말이 스텐프라이팬에서 겹겹이 흩어진 양파처럼 희망의 냄새를 피우며 둥글게 구워지던 날이 있었지
우리의 말이 긴 눈썹을 열고 부드러운 푸른 오솔길을 보여주던 날이 있었지 빨간 스프링의 모가지를 가진 슬픔이 담장 너머로 튀어오르던 날이, 거대한 고기 덩이에서 기름을 떼어내다 미끄러진 도살장의 칼날같은 말이, 너, 내가 아주 모호한 거리에서 만나 헤어지며 주고받은 말이 있었지
나는 그냥 망가진 몸의 상자로부터 뛰쳐나오는 상자에 그려진 무섭고 익살스런 녹색 표정의 마지막 유령이나 되었으면 아무 때나, 아무 곳에도 숨길 수 없는
계간 『시현실』 2010년 봄호 발표
진은영 시인 /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가슴에도 달린 것처럼 기묘하고 집요하고 당황스럽고 참 이상하구나 인유가 심한 시같구나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투명한 삼각자 모서리처럼 눈매가 날카로운 관료에게 제출해야 할 숫자의 논문을 쓰고 “아무도 스무살이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걸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라고 써 보낸 어린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나보다 잘 쓰면서 우연히 나를 만나면 선배님의 시를 정말 좋아했어요, 라고 대접해주는 예절바른 작가들에게, 빈말이지만, 빈말로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니까, 빈밀이 아니더라도 ‘좋아해요’와 ‘좋아했어요’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를 엄밀히 구분할 줄 아는 나는 고학력의 소유자니까, 여전히 고마워하면서, 여전히 서로 고마워들하면서, 그동안 쓴 시들이 소풍날 깡통넥타와 같다는 거 어릴 적 소풍가서 먹다 잊은 복숭아 깡통넥타를 나는 아마 열매 맺지 못할 복숭아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 놓았나 보다. 바람이 불고 깡통 구멍이 녹슬어가고 파리인지 벌인지 모를 것이 한밤에도 붕붕거리고. 그것은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이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대어보았던 곳, 그 진실한 가짜 맛 그러다가 나는 문득 시작해놓은 시가 있으며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월간 『문학사상』 2010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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