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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영숙 시인 / 중세 속으로 들어간 여자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5.

정영숙 시인 / 중세 속으로 들어간 여자

 

 

고욤나무 잎이 햇살에 이울고 산딸기 열매도 빛을 잃는

엉클어진 떨기나무 바람에 갈 길을 잃고 쓰러지는 정원

 

낡은 사프란색 긴 치마, 프릴이 달린 흰 블라우스에 회색빛 바랜 상의 차림의 여인*이 고목에 기대어 휑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천년의 기다림으로 프릴에 감춰진 그녀 목은 마가목 줄기처럼 가늘고 숲그늘에 드리워진 눈빛은 11월 갈잎처럼 어둡고 스산하다 그녀 뒷배경에 그려진 구름 모양의 남자의 실루엣이 눈을 아프게 한다

 

구름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인, 목책에 갇힌 늙은 마가목처럼 몇 백 년 동안이나 저렇게 홀로 서 있었을까 구름 같은 그의 아우라에 싸여 그 곳을 떠나지 못한다는 얘기가 바래지지 않는 유화 물감처럼 화폭에서 선명히 들려오는데....

 

가냘픈 그녀 손이 잡고 있는 회갈색 나무둥치를 툭 건드리면 기다림의 마른 밤송이 투두둑 떨어질 것 같은 오후 두 시, 바스락 갈잎처럼 한 줌 재로 사그라질 것 같아 그녀 손을 잡고 중세를 건너 여기,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데려온다 꿈속 그 남자, 뭉게구름 이는 모네의 연못 속으로 데려온다

 

* 불란서 화가 Jules Bastien­Lepage의 작품 <Joan of Arc>그림 속 여자.

 

월간 『시와 표현』 2016년 11월호 발표

 

 


 

정영숙(鄭英淑) 시인

경북 대구에서 출생. 1993년 시집 『숲은 그대를 부르리』으로 작품 활동 시작. 그 외 시집으로 『지상의 한 잎 사랑』(문학아카데미, 1995), 『물 속의 사원』(문학아카데미, 1999), 『옹딘느의 집』(포엠토피아, 2001), 『하늘새』(황금알, 2007), 『황금 서랍 읽는 법』(문학세계사, 2012) 등이 있음. 2001년 문예진흥 기금 수혜.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여성문학회 회원, 한국카톨릭문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