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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주 시인 / 부표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6.

이승주 시인 / 부표

 

 

  날이 저물고

  도시는 불빛 몇 개로 부표를 띄운다.

  부표에는 시든 꽃묶음 같은 향기도 있고

  더러는 기적처럼

  아직도 젖어오는 향수도 있다.

  날이 저물고 길을 덮으며

  더 낮은 곳으로 흘러들어 고여서

  곳곳에 덫을 놓는 어둠.

  빈 포도 위이거나 옥상이거나

  흔들리거나 혹은 조용하거나

  부표는 닿지 않는 어둠에 뿌리내린다.

 

  사람들이 이 어둠의 도시를 통행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부표를 소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 도시의 낯선 자들은

  불빛 몇 개의 부표를 믿어서는 안 된다.

  어둠은 의뭉한 사냥꾼이므로

  유혹의 꽃으로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먹이를 기다린다.

  트로트에 취하거나

  낙엽 따위의 수집 취미는

  어둠이 좋아하는 사냥감.

 

  어둠이 깊어

  이제 이 도시에 익숙해지려는 자들,

  우리가 어제 만난 그대 이름은 부표.

  도시는 불빛 몇 개로 부표를 띄우고

  우리는 다시 부표에 갇힌다.

 

 


 

 

이승주 시인 / 길 위의 사랑과 슬픔

 

 

어둠이 빗줄기처럼 내리었습니다. 골목길 외등 불빛이 겨우 제 몸뚱이만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깊은 골목에서, 어둠에 젖어, 그때 우리는 만났고 그때 우리는 이미 한 꽃나무를 사랑했습니다. 그 꽃나무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키가 작은 나는 늦은 계절의 잎새 위에 내리는 쓸쓸한 저녁놀을 안타까이 바라보았습니다. 키가 큰 나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꽃봉오리와 사금파리 햇살을 청동처럼 믿었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서로 다른 방향의 전철을 탔다가 무수한 가시에 피 흘린 채 캄캄한 저녁이면 돌아와야 했습니다. 서로의 체온 속으로 무너지고 싶을 때라도 우리의 수줍음 때문에 잠자리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한솥밥을 먹고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슬퍼졌습니다. 어느 한 겨울을 못다 지내고 그날 새벽 우리는 딴 길을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더러는 그리움이 구름 낀 날도 있었습니다.

 

 


 

 

이승주 시인 / 序詩

 

 

  끝내 내가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고사목 뒹구는 허연 달빛 속을 밤새 헤매다

  새벽 강 건너 안개에 싸여

  오랜 벗인 마른 잎새의 적멸 곁으로 갔다.

 

  가을에 나서

  겨울까지

  하늘처럼 이고 살아온

  목숨의 세월.

 

  외로움은

  또 다른 감옥.

 

  가슴에 붙은 이름 석 자를 떼어

  한  잔의 눈물을 남기고

  끝내 그가 떠났다는 기별이 왔다.

 

  3

 

죽음은 삶에 비해 얼마나 가벼운 것이랴. 우리의 인생이 반 줄로 묶일 수 있구나 생각하며 남은 자를 위해 남겨둔 그의 생애의 빈칸에 그를 기억하는 몇 사람을 대신하여 1, 9, 9, 3 나는 또박 또박 못을 박았다. 이제 그가 이승에 남긴 시간은 땅에 닿기도 전에 딱딱하게 굳어져 마른 포도 위를 뒹굴다 부스러지고, 외로운 그의 영혼은 이 도시의 銀河와 가로등 불빛이 이룬 노을의 금물결 속을 떠돌리라.

 

 


 

 

이승주 시인 / 깊은 밤

 

 

  사냥개처럼 뒤쫓던

  발자국

  불빛

  사라지고 그림자

  벽에

  죽은 듯 바짝 엎드린

  나무그늘

  식탁 밑

  공간을

  구석구석

  명주실 몇 타래의

  굴우물

  물거울 위로

  두름처럼 비쳐오는

  돌이끼같이

  반짝이며 살아서

  우리 슬픈 날

 

 


 

 

이승주 시인 / 金山寺 단풍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아는가, 자네

  저 깊은 가을하늘과

  그 위에 뜬

  붉은 저 단풍바다

  사이

  한줄기 바람이 지나는 걸

  여기 와서 보게

  놀 지는 一柱門

  낙엽을 쓰는 노승의 비질에

  열리는 길을 보게나

 

 


 

 

이승주 시인 / 嶺南樓

 

 

이윽고 계집애들은

가로등 한 송이씩을 따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여윈 추녀 불 밝히는 불빛도 차츰 깎이어

홀로 깊어가는 古典의 밤

追懷의 그림자를 안고 흐르는 남천강

어둠 깊을수록 강물은 살아서 오고, 그 위에

한 채의 전설로 떠오르는

잘 풍장 되어 빛나는 촉루

깊은 아름다움은 풍장처럼 깎이는 것

풍장처럼 깎이어 비로소

맑은 가얏고 소리로 울리는 것

맑은 가얏고 소리 울리어

깎인 달 하나 띄우는 것

 

무너미 체육공원 그네를 올라

가얏고 같은 마흔 다섯 李慈玉 선생은

달빛 깎인 열아흐레달 하나 붙였다

 

 


 

 

이승주 시인 / 黃土

 

 

산수유가 피거들랑 나를 잊어

봄 아지랑이 슬프거든 나를 잊어

黃土 언덕 아래

너의 누운 강물이여

배꽃가지 달빛 휘거든 나를 잊어

 

 


 

 

이승주 시인 / 除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한해였습니다

산중 어디에도 싱싱한 강줄기는 없고

바다를 안고자 바다를 찾았으나

갈매기소리 파도소리 한 도막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조차 껴안지 못했습니다

 

가득한 비움으로

다시 앓겠습니다

 

계간 《시와시학》 1995년 겨울호 신인상 당선시

 

 


 

이승주 시인

1961년 대구에서 출생. 1995년 《시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문학세계사, 2001), 『내가 세우는 나라』(고요아침, 2006), 『위대한 표본책』(서정시학, 2010)  과 그밖의 저서로는 『현대시창작백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