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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시인 / 부표
날이 저물고 도시는 불빛 몇 개로 부표를 띄운다. 부표에는 시든 꽃묶음 같은 향기도 있고 더러는 기적처럼 아직도 젖어오는 향수도 있다. 날이 저물고 길을 덮으며 더 낮은 곳으로 흘러들어 고여서 곳곳에 덫을 놓는 어둠. 빈 포도 위이거나 옥상이거나 흔들리거나 혹은 조용하거나 부표는 닿지 않는 어둠에 뿌리내린다.
사람들이 이 어둠의 도시를 통행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부표를 소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 도시의 낯선 자들은 불빛 몇 개의 부표를 믿어서는 안 된다. 어둠은 의뭉한 사냥꾼이므로 유혹의 꽃으로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먹이를 기다린다. 트로트에 취하거나 낙엽 따위의 수집 취미는 어둠이 좋아하는 사냥감.
어둠이 깊어 이제 이 도시에 익숙해지려는 자들, 우리가 어제 만난 그대 이름은 부표. 도시는 불빛 몇 개로 부표를 띄우고 우리는 다시 부표에 갇힌다.
이승주 시인 / 길 위의 사랑과 슬픔
어둠이 빗줄기처럼 내리었습니다. 골목길 외등 불빛이 겨우 제 몸뚱이만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깊은 골목에서, 어둠에 젖어, 그때 우리는 만났고 그때 우리는 이미 한 꽃나무를 사랑했습니다. 그 꽃나무로 인해 괴로웠습니다. 키가 작은 나는 늦은 계절의 잎새 위에 내리는 쓸쓸한 저녁놀을 안타까이 바라보았습니다. 키가 큰 나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꽃봉오리와 사금파리 햇살을 청동처럼 믿었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서로 다른 방향의 전철을 탔다가 무수한 가시에 피 흘린 채 캄캄한 저녁이면 돌아와야 했습니다. 서로의 체온 속으로 무너지고 싶을 때라도 우리의 수줍음 때문에 잠자리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한솥밥을 먹고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슬퍼졌습니다. 어느 한 겨울을 못다 지내고 그날 새벽 우리는 딴 길을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더러는 그리움이 구름 낀 날도 있었습니다.
이승주 시인 / 序詩
끝내 내가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고사목 뒹구는 허연 달빛 속을 밤새 헤매다 새벽 강 건너 안개에 싸여 오랜 벗인 마른 잎새의 적멸 곁으로 갔다.
가을에 나서 겨울까지 하늘처럼 이고 살아온 목숨의 세월.
외로움은 또 다른 감옥.
가슴에 붙은 이름 석 자를 떼어 한 잔의 눈물을 남기고 끝내 그가 떠났다는 기별이 왔다.
3
죽음은 삶에 비해 얼마나 가벼운 것이랴. 우리의 인생이 반 줄로 묶일 수 있구나 생각하며 남은 자를 위해 남겨둔 그의 생애의 빈칸에 그를 기억하는 몇 사람을 대신하여 1, 9, 9, 3 나는 또박 또박 못을 박았다. 이제 그가 이승에 남긴 시간은 땅에 닿기도 전에 딱딱하게 굳어져 마른 포도 위를 뒹굴다 부스러지고, 외로운 그의 영혼은 이 도시의 銀河와 가로등 불빛이 이룬 노을의 금물결 속을 떠돌리라.
이승주 시인 / 깊은 밤
사냥개처럼 뒤쫓던 발자국 불빛 사라지고 그림자 벽에 죽은 듯 바짝 엎드린 나무그늘 식탁 밑 공간을 구석구석 명주실 몇 타래의 굴우물 물거울 위로 두름처럼 비쳐오는 돌이끼같이 반짝이며 살아서 우리 슬픈 날
이승주 시인 / 金山寺 단풍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아는가, 자네 저 깊은 가을하늘과 그 위에 뜬 붉은 저 단풍바다 사이 한줄기 바람이 지나는 걸 여기 와서 보게 놀 지는 一柱門 낙엽을 쓰는 노승의 비질에 열리는 길을 보게나
이승주 시인 / 嶺南樓
이윽고 계집애들은 가로등 한 송이씩을 따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여윈 추녀 불 밝히는 불빛도 차츰 깎이어 홀로 깊어가는 古典의 밤 追懷의 그림자를 안고 흐르는 남천강 어둠 깊을수록 강물은 살아서 오고, 그 위에 한 채의 전설로 떠오르는 잘 풍장 되어 빛나는 촉루 깊은 아름다움은 풍장처럼 깎이는 것 풍장처럼 깎이어 비로소 맑은 가얏고 소리로 울리는 것 맑은 가얏고 소리 울리어 깎인 달 하나 띄우는 것
무너미 체육공원 그네를 올라 가얏고 같은 마흔 다섯 李慈玉 선생은 달빛 깎인 열아흐레달 하나 붙였다
이승주 시인 / 黃土
산수유가 피거들랑 나를 잊어 봄 아지랑이 슬프거든 나를 잊어 黃土 언덕 아래 너의 누운 강물이여 배꽃가지 달빛 휘거든 나를 잊어
이승주 시인 / 除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한해였습니다 산중 어디에도 싱싱한 강줄기는 없고 바다를 안고자 바다를 찾았으나 갈매기소리 파도소리 한 도막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조차 껴안지 못했습니다
가득한 비움으로 다시 앓겠습니다
계간 《시와시학》 1995년 겨울호 신인상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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