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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환 시인 / 아름다움에 대한 소고
아름다움이란 모름다움의 반의어라 하네요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형용사를 미적인 것을 표현하는 용언으로 쓰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알만한 것이라는 뜻일 것인데 창조된 미를 미리 알거나 느낀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마도 아름답다라는 것은 보기에 편안하다는 뜻은 아닐까요 적어도 기분 나쁘지는 않다는,
또한 알만하다는 것은 그 어떤 새로운 앎에 대해 이미 안 적이 없음에도 보는 순간 편안했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아니 인간이 창조한 것들 중에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모름다움이란 말이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역시 정작 몰라서라기보다 바라보기 안 좋은 것이거나 보기에 부담이 된다는 것일 수 있겠네요
그러나 앎과 모름이 뭐 그리 중요한 것일 수 있겠나요 느낌이지요 감이지요 아니면 인간만이 갖고 있는 문자와 그 유희이지요 파롤이지요
시집 『탈주냐 도주냐』(종려나무, 2009) 중에서
민경환 시인 / 미로에서 길을 잃다
길을 잃었네 채 한 시간도 되기 전 검은 동해바다를 뒤로하고 내달리다 삼척 하장을 지나 미로 근처에서 아니 신기쯤부터였을까 길은 새 단장을 했으나 오래된 길처럼 흙먼지와 석탄가루가 뒤엉켜 아스팔트 위를 훑고 지나는 듯한데 어린 시절 유배를 떠나던 길처럼 눈에 익네 어쩌면 다른 시간 속을 부유 중인가 보네 어디 끝 모를 동굴 속을 헤매는 것인지 아슴아슴한 기시감이 목줄기를 훑고 지나네 지난해 서설 위에 켜켜이 쌓인 눈으로 인해 속살을 모두 드러낸 듯한 산속에는 춥고 굶주린 산짐승 날짐승들이 바위 뒤거나 나무 등걸에서 맑은 눈을 들어 생을 헤매는 한 화상을 좇고 있을 것이네 근처에는 범접키 쉽지 않은 금강송 군락도 있을 것이고 더 깊은 골 어딘가에는 무릉도원도 있을 것인데 세속을 잊고 구도도 않으며 산 그림자처럼 조용한 사람이 초근목피하는 너와집 하나 정도는 만날 수도 있을 것이네 명동하는 세상이 어떤 것의 사라짐을 향해 '실종'이라거나 '멸종'이라는 말로 처리하고 말더라도 서러울 것 하나 없겠는가 사라짐이란 이렇게 불현듯 이루어져야 맞는데 길 잃은 척만 하고 있네 사라진 것들은 늘 말이 없고 남은 것들만 그리움에 몸을 떨 뿐이지 핏발 선 눈으로 어울려 서로의 간을 저몄던 일들과 살기 위해 함부로 간구했던 위해로운 노동들과 필설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가계를 두고 어디론가 가고 싶었던가 사랑은 하면 할수록 아프고 삶은 추스를수록 흘러내리네 여기는 迷路이고 저기는 美路인가 아니면 내가 아직 未老여서 가닿지 못한 거기가 未路인가
시집 『탈주냐 도주냐』(종려나무, 2009) 중에서
민경환 시인 / 지수는 크라이스트
마리아의 남편은 박요섭 마리아의 본명은 허스챙겔 마리아는 요섭이 부르는 허부인의 애칭 마리아는 스물여덟의 미혼모 마리아의 아들은 지수 지금 한국에서 허부인의 직업은 편의점 알바 요섭은 아파트 건축현장의 목수 어느 체재에서나 악착같지 못하다는 건 씨앗을 뿌리기 힘들다는 뜻 요섭은 마흔이 되도록 취업가방을 매고 다녔다지 그러다보니 시집을 오려는 여자가 없어 그래도 장가는 가야겠기에 그간 모은 달란트를 싸들고 몽골로 날아갔다는 데 거기서 마리아를 만났던 거지 여러 여인 중에 그녀에게 훅 간 건 옛 영화 속의 마리아 역의 올리비아 핫세를 닮았었던 것 게다가 깎아 놓은 밤톨 같은 아이까지 딸렸다는 거였어 혼인이 성사된 얼마 후에 마리아는 아이를 데려왔고 요섭이 아이를 민적에 올리려 한국 이름을 지으려는데 마리아는 이름에 꼭 `지`자를 가운데 쓰고 싶다고 하는 거라 지호 지철 지석 지수 지억 지만 지천 지백 등등 중에 마리아는 꼭 찍어 지수를 선택하네 요섭은 내심 놀랐지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의 아비가 됨을 느꼈던 거지 동쪽으로 온 성자는 앞으로 잘 자라서 대평원을 호령하는 칸이 되거나 이십일 세기의 메시아가 될지도 모를 일 채기는 동정녀 마리아 요섭은 사람 짓는 목수 그래서 지수, 는 크라이스트
계간 『미네르바』 2015년 여름호 발표
민경환 시인 / 오후 5시 경의 두려움
왜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는가 점점이 구름 뜬 하늘을 훔치듯 바라보는 자여 그런 류의 비애는 본래 슬퍼서가 아니다 더는 만져질 것 같지 않은 비린 생의 내력을 어느 지점쯤에서 포맷이 가능하겠는가
돌연 어두운 장막을 헤치고 달려 나온 방랑자가 햇살 눈부신 초원을 정처 없이 내딛는 것처럼 지금은 뜬금없이 열에 떠 공활하고 속절없다
북쪽을 향해 한껏 달리다 서쪽을 바라본 자의 검붉은 마음의 안쪽, 월악산 제비봉을 오르는 산 중턱의 아름드리 소나무에 경배한다 “적어도 목을 매려면 저 정도 굵기는 되어야지!”
그냥 털썩 주저앉아 저 노을의 내부에 잠기고 싶다 괜스레 짜릿하고 두근거리는 저녁 답에 얼굴 모르는 어머니가 “환아!”하고 부르는 환청이 들린다
계간 『미네르바』 2015년 여름호 발표
민경환 시인 / 허공을 갈아엎으며
누구나 처음에는 순정하다 삼류라 불리던 네 인생도 일어설 수는 있었다 하얀 박 속을 연모하던 그땐 너도 속이 무척 고왔다 일어선 너만이 당했던 것이 아니다 백주에 놀랐었다 알량한 것들일수록 더욱 추한 발광이다 누구나 마음을 속일 수도, 들킬 수는 있다 화들짝 놀라면서 간을 움추려 보려할 테지만 그땐 이미 때가 너무 늦다 더 처 싸 바르지 말고 이젠 속죄나 할 일이다 습한 볕에라도 네 그 보지락을 과감히 내어다 말릴 일이다
시는, 이젠 그리하여, 네 그 지렁이의 똥이다 시인은, 그리하여, 이젠 네 그 잠수함 속의 자웅동체이다 네 그 사발통문이다 때로는 네 그, 안쓰러운 몸짓, 마구 나뒹구는 그 표리부동이다 언제 어디에서건 네 그 더러운 웅덩이는 있고 언제 어디에서건 너는 땅 구멍 속으로 스며들 수는 있다 차라리 너는 그 더러운 두엄더미 속일 때가 더 편안했었는지도 모른다 흙을 처먹는 흙을 싸고 흙에 씹히면서 또 흙을 마구 게워내는 너 그 위를 마구 뒹굴면서 늘였다 당기면서 축축한 그 배때기로 기어 붉고 기름진 그 주름살로 여기저기로 딱딱한 저 땅거죽까지 훈김 나는 네 그 사타구니를 꽉 죄어 붙이고 부지런히 기어서,
볕이 환한 곳은 피해서 이젠 더 멀리로 기어가야 하리 네 그 거짓 시인이었던 이 대명 천지에, 거짓 시인이었던, 이었던, 나와버린 그 죄로,
민경환 시인 / 폭설
새벽엔 누구나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밤새 내 깊은 고향처럼 많은 눈이 내렸는지 문을 밀자 됫박 위의 쌀처럼 몰려서는 눈더미 이게 얼마만인가 아내가 끌어간 이불을 당긴 듯 조금은 묵직한, 또는 가벼운 작고 순한 것들이 무리지을 때 떨면 안돼 하면서, 그러니까 봄부터 게을렀던 뜰은 이미 덮였을 테고 싸악싸악 이것은 앞집 춘현 아버지 눈 치는 소리 세상은 다 보지 않아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듯 가느다란 체면과 얇은 뼈마디로 선, 속 뻔한 몸주라도 잠시 잊을 수 있는 건 잊을 수 있어야 한다 창틀에 바람막이로 친 비닐이 잘게 펄럭인다 그래선가, 소리없이 덜거덕거리며 이문없이 산 가세여선가 재 너머 시설 농사 짓는 후계자 부부 후끈 단 얼굴이 떠오른다 어느 순간 퍽썩 하고 주저앉을 이웃을 옆에 두고도 오래된 버릇처럼 눈을 기다렸나보다 속없이, 투둑! 뒷곁에 죽은 밤나무 가지 부러지는 소리 지난 여름 황톳물이 이 낮은 문턱을 넘었을 때도 저런 소리 들렸었지만 지금 이건 터무니없는 호사다 문 뒤에 밀려난 저 눈처럼 넘쳐났던 적 없었기에 저토록 순하고 풍성하여도 괜히 켕기는 따로 생겨나 엉켰다가 눈시울만으로도 사라져버릴 눈 같은, 눈이 너무 많이 와 마음 더 이상한 난분분한 이 아침
민경환 시인 / 강도가 문제다
감미로운 파동이 넘실대며 전해져온다 점액질의 꿈자리에 밝은 빛의 뇌수가 출렁인다
꽃은 피었다 떨어지고 꽃 진 잎 자리보다 꽃이 져 머물렀던 자리가 더욱 휘황하다
인간계가, 세계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식탁 위에 놓인 연한 저 두부는 쉽게 몸을 허문다 나라도 땅 위의 저 공극에 몸을 들이밀지 말자 바람이 어느새 빈틈을 비집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수억만 년 동안을 스스로 끓이며 식히며 뒤척인 암반 밑의 액체여 나는 무엇으로 흐물어지겠는가 바람처럼, 물처럼, 연한 저 두부처럼 굳어진 것들은 다가서지 못한다 흐물어지기엔 우리의 생이 너무 짧고, 겪은 것이 너무 적다
꽃은 지고 갖은 경도의 보석이 저토록 엄연히 열린다 저 견고한 것들 사이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다 나뭇잎에 빗물이 듣는다 단단한 것들일수록, 순간, 약해빠진 것일 수도 있다는 걸 불현 깨닫는다
`이렇게 얼마나 길 갈 수 있을려나 ` 어쨌든 늘 나는 强度가 문제인 것이다
민경환 시인 / 새
넘어지는 해가 붉다 우거진 원시림을 헤치고 사람을 닮은 새가 체온을 고른다 잠시 멍하니 뇌조雷鳥가 된다 방금 철원농협에 들렀다 컴퓨터가 지목한 신용불량의 늪에 빠져 있는 한 마리 새를 보았다 지뢰밭이다 그 위를 날아오르는 새떼를 바라본다 지나온 냉기의 텃밭이 寒食 즈음의 뗏장처럼 각이 져 있다
노동당사가 치장을 했다 근대문화유적으로 지정되었기에 당연히 보호되어야 한다 그 앞논에 생겨난 스케이트장에서 아이놈 둘이 얼음을 지친다 한 놈이 얼음 위에 엎어져 한참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사냥꾼의 총구를 못 피한 산짐승의 형국이다 또 한 놈은 빙글빙글 흥에 겨워 아직은 어린 生을 지친다
열을 지어 해거름을 나르는 새를 아쉬워한다 저 들녘은 철새를 먹이고 사람을 먹이고 빚을 만든다 무언가를 떼어먹고 달아나는 새를 추궁할 수 없다 독수리의 느린 날갯짓은 거대한 먹이사슬의 정조이다 새가 옮겨 앉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것처럼 한 하늘에 동짓달 상현이 넘어지는 해를 배웅하고 있다
새도 오래 전엔 이빨을 지녔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민경환 시인 / 슬픔을 위하여
빛나는 4월의 아침 햇살을 보니 괜스레 눈물이 나네 허공을 미는 대추나무 새 순도 반짝이네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약속은 없었고 희망을 알처럼 품고 살아야함을 세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길러졌지
우연하게 발견되는 기쁨이란 없다네 일찍이 슬픔이 기쁨에게 말했었고 어쩌지 못할 인연의 고리들이 마음 밖을 내뛰더니 냉이꽃 다북쑥 무성한 마당 한 귀퉁이에 서서 슬픔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네
그래 까닭 없이 생기는 슬픔도 있을 수 없지 길을 가다가 쉴 짬에 당해버린 서러운 일들을 다시 떠올리며 어느 외양간 딸린 슬레이트 지붕 아래서 몸 뒤척이며 긴 밤을 지샌 우리의 희망이 갑자기 닥쳤던 창피에, 창녀의 모욕에 오른쪽 눈을 피눈물로 물들이고 있네
그렇게 계획에 없던 일들을 밀치고 돌연히 얇은 창을 부수고 닥친 저 봄 이 아침의 빛줄기로는 한 작은 마을의 쉬쉬한 소문을 지울 수가 없네 왜 기쁨을 슬픔이라고들 하고 있는가 왜 사람들만이 그러고들 있는가
마음의 텃밭이 스스로를 빛내며 우는데 가정할 수 없는 우연한 사연들의 연속은 웃으며 기쁨을 자꾸 매질하네 매맞는 기쁨이 외치네,
오, 페이소스! 페이소스! 간증의 페이소스!
흔들릴수록 바람은 눈에 보이고 비틀거릴수록 가볍게 중력을 받아들이는 한 세월이 무거운 사람이 그 상처를 핥고 있네
질긴 질서의 가시덤블 속을 지나온 뒤에도 아픔은 새살로 돋을 것이기에 긁지는 말아야하리 상처의 가려움은 치유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에 무딘 손톱일지라도 긁지는 말아야하리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은, 단지, 적반하장의 정리되지 않은, 반성되지 않은 시간의 버성김 때문이지
계간 《애지》 2003년 봄호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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