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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관용 시인 / 크레용과 국화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5.

김관용 시인 / 크레용과 국화

 

 

 벽을 미는 동안 나는 벽에서 시작하지 비스듬히 곯아떨어진 건 바로 새벽이었지 헤어진 지 2주 만에 고독이 찾아왔지 내 앞의 쇠붙이를 사랑했을 때 아낄 것이 없었지 네 앞에서 크레용을 발견했지 아아, 감기 걸린 아이의 이마에 흐르는 미열처럼 여러 번 방전했고 방전한 얼굴은 유리처럼 깨져버렸지 수백 개의 태양이 파편이 되어 날아갔지 더러는 혈관 속으로 더러는 심장 속으로, 절개하지 않고는 꺼낼 수 없는 계절이 되었지 크레용으로 그린 국화가 있었지 특이한 캐릭터였지 국화 속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고, 아니 두 사람, 어쩌면 세 사람이 함께 누워 있었는지도 모르지 너의 지도는 희미해졌고 널 멈추고 싶었지 백색 암소들이 삼키는 검은 건초들의 부스러질 듯한 열망, 위턱과 아래턱의 간격을 생각해 보았지 아아, 상상만으로 백조가 되려는 인간은 쉽게 병들어 버렸지 또한 아내의 체위로 잠자리가 날아들었지 너에게 깊어지려고 얼굴을 돌렸지 얼굴은 부서진 새장으로 보였지 새장 밖으로 날아간 새를 기다리는 일, 아아, 소용이 없었지 벽을 미는 동안 나는 벽에서 시작하지 헤어진 지 2주 만에 찾아온 고독은 나를 쇠붙이로 만들어 버렸지 커피향이 나는 두 개의 별자리를 끄집어내고 국화는 끝내 구겨버렸지 벽에 기대었을 때 그리하여 벽은 나로부터 시작하였지

 

계간 『시작』 2016년 여름호 발표

 

 


 

김관용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화엄학 전공). 201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