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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도이 시인 / 꽃주름 세탁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8.

김도이 시인 / 꽃주름 세탁소

 

 

 구겨진 건 진저리난다고 세탁물 팽개치고 엄마가 도망 간 날, 아버진 뜨거운 다리미판처럼 눌러 붙어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술 취한 재봉틀 위에선 드르륵드르륵 엄마가 박음질 되었고 내 등엔 실밥자국이 꽃처럼 피어났다

 

등이 아파요 옷걸이에 걸린 내가 버둥거리면 세탁소 천장 맨 구석께로 날 옮겨 걸었다 부스럭 거리는 비닐들 속에 원피스가 엄만 어디 가셨니, 탈수통은 눈물을 쏟으며 징징거렸지만 아버진 쉭쉭 단내를 스팀처럼 뿜으며 묵묵히 주름을 펴고 있었다

 

 폼 나게 다려진다는 건 다리미판 위에서도 어려웠다 늘 숨어있는 주름이 문제였다 사람들이 밟고 가 쪼글쪼글 해진 전단지 속 엄마가 젖은 빨래보다 더 구겨져 수거되어 온 날, 아버진 꽃무늬 원피스를 싹둑 잘라 수선대에 올려놓았다

 

엄마를 자르지 말아요 시침 핀들이 꼭꼭 찔러댔지만 돌돌돌 아버지 재봉틀 위에서 구겨진 엄마가 시냇물처럼 흘러가고 꽃잎에 깊게 패인 주름 위로 봄날이 지난다

 

 


 

 

김도이 시인 / 불량튀밥

 

 

무엇이든 부풀리기 좋아했던 아버지,

부풀대로 부풀다가 어느 날 뻥!

터져버렸네

 

고층 아파트 후문 옆

빛바랜 비닐천막 바람도 헛소문처럼 들고 나는데

하루 종일 구부정한 ‘뻥이요’를 외치던

뻥! 연기 속에 간곳을 모르네

 

흰 튀밥 꽃잎처럼 철망자루에 붙어있고

배불뚝이 무쇠도 몸 풀 날 기다리는데

볼품없는 문짝에 자물통 열릴 줄 모르네

 

벚꽃이 튀밥처럼 흩어지는 저녁

부풀린 만큼 커진다고 믿는 빈 자루

홀쭉한 위장을 달래며 기웃거리다

빵그랗게 복수 찬

배를 하염없이 들여다보네

 

뒤집어지는 밥상에

어머니, 불발된 밥알을 줍다가

봄날이 가고 있네

 

 


 

 

김도이 시인 / 어떤 피아노

 

 

햇볕이 들지 않는 웅크린 골방, 기저귀 박스에 깔린 피아노가 신세 처량하다 고집 센 뒷방 노인네 속없이 돌아앉은 모습이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뚜껑에 갇혀 온종일 늙은 피아노가 심심해 어쩌다 하는 일은 아기기저귀 내어주고 풀썩거리는 먼지와 노는 일 뿐

 

 눌러 붙은 성대는 발성을 잊은 지 오래, 책장 속 낡은 악보의 음계를 기억하는 것은 이번 생을 지나느라 한없이 닳아진 손가락들, 한때는 그 손가락들이 조율이 잘 되어 밝은 공명으로 퍼져 나간 적도 있는, 지금은 자신의 음조차 소음이 되어 버린 애물단지 미완성교향악을 연주하던 고통의 건반들이 진단서 받은 악보처럼 튀어 오른다

 

오래 내려앉은 곰팡이 같은 먼지에 낮은음자리로 쿨럭거리는 기침소리, 악보 같은 차트위에 치매 앓는 음표들이 불안한 듯 빠르게 리듬을 탄다 한숨처럼 토해 놓은 건반에 박자를 놓치시는 아버지, 처방전 받은 옹알옹알 도돌이표 화음으로 돌아온다

 

 


 

 

김도이 시인 / 환절기 구두

 

 

  발길 끊긴 저수지

  낡은 빗줄기 한 켤레

  며칠 째 웅크리고 찌를 매고 앉아있다

  물속으로 걸어간 의자는 감감 소식이 없어

  찬비에 온 몸 움찔움찔 떨리는데

  퍼붓는 비는 속도 모르고

  공복인 낚시 바늘 오락가락 입질만 하고 있다

  발광하던 야광은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

  물살에 지워진 수위水位 넘어 가 버리고

  비는 점점 냉정해져 눈발 들이 치는데

  금 간 저수지 퉁퉁 입이 불어

  완강하게 제 몸 걸어 잠근다

  휑하니 뚫려 찢긴 공터마저

  폭설 쌓이며 계절을 끊는다

 

  봄볕 들이치고

  배곯아 야위어가도 속내를 풀어놓은

  햇빛 속 어린씨앗 하나

  갸웃갸웃 살그머니 발 디밀어본다

 

2014년 《열린시학》 등단시

 

 


 

김도이 시인

2014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얼룩의 시차』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