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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다인 시인 / 겨울변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8.

정다인 시인 / 겨울변주

 

 

  모든 현악기의 소리는 누군가의 영혼이다

  손을 넣어 휘휘 저어 보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어스름 속에서

  태어난 소리들

  공중을 한 켜 한 켜 저며서 일으킨 음들을 얇은 이불처럼 두르고 나는

  눈 쌓인 겨울을 걷는다

  푹푹 빠지는 발목에서부터 귀까지 목적지 없는 여정을 새겨 넣은

  음들의 동면을 생각하면서, 영혼을 투명하게 얼리고 싶은 날들이 있다

  어떤 선율은 현악기의 오래된 물관에서 생겨난다는데

  보이지 않는 저 굴곡들을 안으로 옮겨 심으면 내게도 음계가 생겨날까

  저녁의 눈빛으로 한 음씩 물들어가는 얼굴 위에

  음계를 그려본다

  제각각의 발소리로 오르내리는 영혼들이 귓속을 스치고

  사그락사그락 눈이 쌓인다

  눈이 쌓인다

  귓속이란 악기 속 같아서 너무 많은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차가운 발가락을 하나씩 그 안에 담그면

  푹푹 빠지던 걸음을 몰고 어딘가로 쏘다녔던 날들이 쏟아진다

  폭설, 또 폭설

  누군가의 말투 같은 눈발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나는 귀를 기울인다

  현을 건드리는 차갑고 골똘한 바람을 따라

  떠도는 영혼들의 허밍,

  그건 한 음씩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는 끝없는 둔갑술

 

  몰려오는 흐느낌은 어디에 매달아 두어야 할까

 

  고개를 한 번도 흔들어 본 적 없는 것처럼,

  굳은 목을 한 줄 현으로 걸고

  흩날리는 긴 곡선을 어루만진다 선율이 되지 못한 말들, 폭설

  또 폭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냉기를 혀 위에 올려두면 귓속엔 멀리서 들려오는

  발 벗은 현들의 떨림

  아직 이름 짓지 못한 내가 쏟아져 내리는 겨울 한가운데

  현악기의 가지들이 일제히 운다

  모든 것을 버린 후에야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걸까

  꽁꽁 언 잠 위에 우수수 떨어지는 음표들,

 

  폭설이 쌓인 현악기의 주름 속에서 가늘고 차가운 첫음이 시작된다

 

  시린 발가락을 천천히 내디디면 일제히 울려 퍼지는 내 안의 겨울, 겨울

 

월간 『현대시』 2017년 5월호 발표

 

 


 

 

정다인 시인 / 드라이아이스 드라이빙

 

 

  나를 스쳐간 감정을 이목구비의 속도라고 읊조릴 때

  풍경은 당신 밖에서 뜨겁게 식고 있었다

 

  로타리를 돌면서 문득 쓸쓸해졌다 곡선을 끼고 돌다 곡선에 갇혀버리는

  당신의 얼굴 속에서 길을 잃었다

  엔진이 필요 없는 심장을 달고 시간은 아무렇게나 쿵쾅거리고,

  희디흰 고사목의 주검처럼 서서히

  또 견고하게 나는 로타리를 돌았다 나이테처럼

  제 살 속에 내재율을 새기는 차갑고 뜨거운 덩어리를

  삼켜야 했으므로

 

  찬란이라는 말 속엔 빛이 없었다

 

  곡선 다음의 곡선, 그 다음의 휘어짐이

  내 얼굴의 눈코입이어서

  나는 표정을 갖지 못했다

 

  서서히 물들어가는 저물녘은

  당신에게서 시작된 포물선, 낮아지면서 무거워진다

 

  차창을 내리면 비린 하늘이 아직도 돌고 있는 이 별의

  지친 여정을 받아 적고 있다

 

  나의 속도는 웃음이었다가 울음이었다가

  마침내 로타리 바깥으로 휘발된다

  당신 바깥에서 다 녹아버린 풍경을 이 별의 체온이라고 할까

  돌고 돌고 다시 도는

  기화의 순간들이 하루치의 원심력으로 퍼져나가면

  고통도 없이 밤이 온다

 

  희미해져가는 당신의 이름 아래 잠들어 있는

  한 움큼의 울음을 빌려

  차가운 파문을 읊조린다 조금씩 커지는 원의 둘레를 따라

  세상은 얼굴을 지우고

  미아가 된다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지는 시간이 오고 있다는 예감을

  나는 또,

  손목 위에 올려놓는다 바퀴가 돌아간다

 

격월간 『시사사』 2016년 7~8월호 발표

 

 


 

정다인 시인

2015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자 k』(한국문연, 2017)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