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시인 / 이별
아아 사람은 약한 것이다, 여린 것이다, 간사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사랑의 이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 사랑을 바꾸는 님과 님에게야, 무슨 이별이 있으랴. 이별의 눈물은 물거품의 꽃이요, 도금한 금방울이다.
칼로 베인 이별의 '키쓰'가 어데 있느냐. 생명의 꽃으로 빚은 이별의 두견주(杜鵑酒)가 어데 있느냐. 피의 홍보석(紅寶石)으로 만든 이별의 기념반지가 어데 있느냐. 이별의 눈물은 저주의 마니주(摩尼珠)요, 거짓의 수정이다.
사랑의 이별은 이별의 반면에, 반드시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이다. 혹은 직접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간접의 사랑이라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별하는 애인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애인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면, 무궁을 회전하는 시간의 수레바퀴에 이끼가 끼도록 사랑의 이별은 없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참'보다도 참인 님의 사랑엔, 죽음보다도 이별이 훨씬 위대하다. 죽음이 한 방울의 찬 이슬이라면, 이별은 일천 줄기의 꽃비다. 죽음이 밝은 별이라면, 이별은 거룩한 태양이다.
생명보다 사랑하는 애인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는, 괴롭게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큰 희생이다.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죽지 못하는 가장 큰 고통이요, 보은이다. 애인은 이별보다 애인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까닭이다. 사랑은 붉은 촛불이나 푸른 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 마음을 서로 비치는 무형(無形) 에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잊지 못하고, 이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웃지 못하고, 이별에서 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인을 위하여는 이별의 원한을 죽음의 유쾌로 갚지 못하고, 슬픔의 고통으로 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차마 죽지 못하고, 차마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곳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애인의 포옹만 사랑할 뿐 아니라, 애인의 이별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때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간단(間斷)이 없어서 이별은 애인의 육(肉)뿐이요, 사랑은 무궁이다.
아아 진정한 애인을 사랑함에는 죽음의 칼을 주는 것이요, 이별은 꽃을 주는 것이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진이요 선이요 미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석가요 모세요 짠다크다.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繡의 비밀
나는 당신의 옷을 다 지어 놓았습니다. 심의도 짓고, 도포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습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적은 주머니에 수 놓는 것뿐입니다. 그 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짓다가 놓아두고 짓다가 놓아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아프고 쓰린 때에 주머니에 수를 놓으라면,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넣을 만한 무슨 보물이 없습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 것입니다.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反比例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당신의 얼굴은 〈흑암(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요.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거짓 이별
당신과 나와 이별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가령 우리가 좋을데로 말하는 것과같이, 거짓 이별이라 할 지라도 나의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거짓 이별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떠날 것인가요. 한 해 두 해 가는 것이 얼마 아니 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시들어가는 두 볼의 도화(桃花)가 무정한 봄바람에 몇 번이나 스쳐서 낙화가 될까요. 회색이 되어가는 두 귀 밑의 푸른 구름이, 쪼이는 가을 볕에 얼마나 바래서 백설이 될까요. 머리는 희어가도 마음은 붉어갑니다. 피는식어가도 눈물은 더워갑니다. 사랑의 언덕엔 사태가 나도 희망의 언덕앤 물결이 뛰놀아요. 이른바 거짓 이별이 언제든지 유리에게서 떠날 줄만은 알아요. 그러나 한 손으로 이별을 가지고 가는 날은 또 한 손으로 죽음을 가지고 와요.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心[심]
心[심]은 心[심]이니라. 心[심]만 心[심]이 아니라 非心[비심]도 心[심]이니 心外[심외]에는 何物[하물]도 無[무]하니라. 生[생]도 心[심]이오 死[사]도 心[심]이니라. 無窮花[무궁화]도 心[심]이오 薔薇花[장미화]도 心[심]이니라. 好漢[호한]도 心[심]이오 賤丈夫[천장부]도 心[심]이니라. 蜃樓[신루]도 心[심]이오 空華[공화]도 心[심]이니라. 物質界[물질계]도 心[심]이오 無形界[무형계]도 心[심]이니라. 空間[공간]도 心[심]이오 時間[시간]도 心[심]이니라. 心[심]이 生[생]하면 萬有[만유]가 起[기]하고 心[심]이 息[식]하면 一空[일공]도 無[무]하니라. 心[심]은 無[무]의 實在[실재]오, 有[유]의 眞空[진공]이니라. 心[심]은 人[인]에게 淚[루]도 與[여]하고 笑[소]도 與[여]하나니라. 心[심]의 墟[허]에는 天堂[천당]의 棟樑[동량]도 有[유]하고 地獄[지옥]의 基礎[기초]도 有[유]하니라. 心[심]의 野[야]에는 成功[성공]의 頌德碑[송덕비]도 立[립]하고 退敗[퇴패]의 紀念品[기념품]도 陳列[진열]하나니라. 心[심]은 自然戰爭[자연전쟁]의 總司令官[총사령관]이며 講和使[강화사]니라. 金剛山[금강산]의 上峯[상봉]에는 魚鰕[어하]의 化石[화석]이 有[유]하고 大西洋[대서양]의 海底[해저]에는 噴火口[분화구]가 有[유]하니라. 心[심]은 何時[하시]라도 何事何物[하사하물]에라도 心[심] 自體[자체]뿐이니라. 心[심]은 絶對[절대]며 自由[자유]며 萬能[만능]이니라.
월간『惟心(유심)』제Ⅰ호 1918년 9월호 발표
한용운 시인 / 服從
남들은 自由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服從을 좋아하여요 自由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服從만하고 싶어요 服從하고 싶은데 服從하는 것은 아름다운 自由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幸福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服從하라면 그것만은 服從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服從하려면 당신에게 服從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낮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矗石樓는 살 같은 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論介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論介여. 그대는 朝鮮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詩人으로 그대의 愛人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구나.
나는 黃金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當年을 回想한다. 술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鬼神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픈 그대의 마음은 비록 沈着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朝雲이냐, 울음의 暮雨이냐, 새벽달의 秘密이냐, 이슬꽃의 象徵이냐. 빠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우지 못한 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醉하여 얼굴이 붉었다. 玉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히운 江 언덕의 묵은 이끼는 驕矜에 넘쳐서 푸른 紗籠으로 自己의 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볼 機會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容恕하여요 論介여, 金石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容恕하여요 論介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恨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黃金으로 새겨서 그대의 祠堂에 紀念碑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曲調를 烙印으로 찍어서 그대의 祠堂에 祭鍾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贖罪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遺言)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永遠히 다른 女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盟誓입니다. 容恕하여요 論介)여, 그대가 容恕하면 나의 罪는 神에게 懺悔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千秋에 죽지 않는 論介여. 하루도 살 수 없는 論介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容恕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論介여.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生의 藝術
모르는 결에 쉬어지는 한숨은 봄바람이 되어서 야윈 얼굴을 비치는 거울에 이슬꽃을 핍니다 나의 周圍에는 和氣라고는 한숨의 봄바람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水晶이 되어서 깨끗한 슬픔의 聖境을 비칩니다 나는 눈물의 水晶이 아니면 이 세상에 寶物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한숨의 봄바람과 눈물의 水晶은 떠난 님을 그리워 하는 情의 秋收입니다 저리고쓰린 슬픔은 힘이 되고 열이 되어서 어린 羊과 같은 작은 목숨을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님이 주시는 한숨과 눈물은 아름다운 生의 藝術입니다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滿足
세상에 滿足이 있느냐 人生에게 滿足이 있느냐 있다면 나에게도 있으리라
세상에 滿足이 있기는 있지마는 사람의 앞에만 있다 距離는 사람의 팔 길이와 같고 速力은 사람의 걸음과 比例가 된다 滿足은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다
滿足을 얻고보면 얻은 것은 不滿足이오 滿足은 依然히 앞에 있다 滿足은 禹者나 聖者의 主觀的 所有가 아니면 弱者의 期待뿐이다 滿足은 언제든지 人生과 竪的 平行이다 나는 차라리 발꿈치를 돌려서 滿足의 묵은 자취를 밟을까 하노라
아아 나는 滿足을 얻었노라 아지랭이 같은 꿈과 金실 같은 幻想이 님 계신 꽃동산에 들릴 때에 아아 나는 滿足을 얻었노라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葡萄酒
가을 바람과 아침볕에 마치 맞게 익은 향기로운 포도를 따서 술을 빚었습니다 그 술 고이는 향기는 가을 하늘을 물드립니다 님이여 그 술을 연잎잔에 가득히 부어서 님에게 드리겠습니다 님이여 떨리는 손을 거쳐서 타오르는 입술을 추기셔요
님이여 그 술은 한 밤을 지나면 눈물이 됩니다 아아 한 밤을 지나면 포도주가 눈물이 되지마는 또 한 밤을 지나면 나의 눈물이 다른 포도주가 됩니다 오오 임이여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나는 잊고저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히기로 행여 잊힐가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히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落花
떨어진 꽃이 힘없이 大地의 품에 안길 때 애처로운 남은 香氣가 어대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가는 바람이 적은 풀과 속삭이는 곳으로 가는 줄을 안다. 떨어진 꽃이 굴러서 알지도 못하는 집의 울타리 새이로 들어갈 때에, 쇠잔한 붉은 빛이 어대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떨어진 꽃이 날려서 적은 언덕을 넘어갈 때에, 가엾은 그림자가 어대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봄을 빼앗아 가는 惡魔의 발밑으로 사라지는 줄을 안다.
일간『조선일보』 1936년 4월 3일字
한용운 시인 / 두견새
두견새는 실컷 운다 울다가 못다 울면 피를 흘려 운다
이별한 恨이야 너뿐이랴마는 울래야 울지도 못하는 나는 두견새 못된 恨을 또 다시 어찌하리
야속한 두견새는 돌아갈 곳도 없는 나를 보고도 「不如歸 不如歸」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꿈이라면
사랑의 束縛이 꿈이라면 出世의 解脫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無心의 光明도 꿈입니다 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不滅을 얻겠습니다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비
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비는 해를 가리고 하늘을 가리고 세상 사람들의 눈을 가립니다.그러나 비는 번개와 무지개를 가리지 않습니다.
나는 번개가 되어 무지개를 타고 당신에게 가서 사랑의 팔에 감기고자 합니다.비오는 날 가만히 가서 당신의 침묵을 가져온대도 당신의 주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비오는 날에 오신다면, 나는 연(蓮)잎으로 웃옷을 지어서 보내겠습니다. 당신이 비오는 날에 연잎옷을 입고 오시면, 이 세상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비 가운데로 가만히 오셔서 나의 눈물을 가져 가신대도 영원한 비밀이 될 것입니다.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사랑의 존재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 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미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黑闇面을 반사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출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을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 존재입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壽命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 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쥐
나는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말하여도 너는 작고 방정맞고 얄미운 쥐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너는 사람의 결혼 의상(結婚衣裳)과 연회복(宴會服)을 낱낱이 조사하였다. 너는 쌀궤와 멱서리를 다 쪼고 물어 내었다. 그 외에 모든 기구를 다 쪼아 놓았다. 나는 쥐덫을 만들고 고양이를 길러서 너를 잡겠다. 이 작고 방정맞고 알미운 쥐야.
그렇다 나는 작고 방정맞고 얄미운 쥐다. 나는 너희가 만든 쥐덫과 너희가 기른 고양이에게 잡힐 줄을 안다. 만일 내가 너희 의장(衣欌)과 창고(倉庫)를 통거리째 빼앗고 또 너희 집과 너희 나라를 빼앗으면 너희는 허리를 굽혀서 절하고 나의 공덕(功德)을 찬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역사에 나의 이름을 크게 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큰 죄를 지을 만한 힘이 없다. 다만 너희들의 먹고 입고 쓰고 남은 것을 조금씩 얻어먹는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작고 방정맞고 얄미운 쥐라고하며 쥐덫을 만들고 고양이를 길러서 나를 잡으려 한다.
나는 그것이 너희들의 철학이요 도덕인 줄을 안다. 그러나 쥐덫이 나의 덜미에 벼락을 치고 고양이의 발톱이 나의 옆구리에 샘을 팔 때까지 나는 먹고 마시고 뛰고 놀겠다. 이 크고 점잖고 귀염성 있는 사람들아.
일간『조선일보』 1936년 3월 31일字
한용운 시인 / 첫키스
마셔요, 제발 마셔요. 보면서 못 보는 체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입술을 다물고 눈으로 말하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뜨거운 사랑에 웃으면서 차디찬 잔 부끄럼에 울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세계의 꽃을 혼자 따면서 항분(亢奮)에 넘쳐서 떨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미소는 나의 운명의 섬에서 춤을 춥니다. 새삼스럽게 스스러워 마셔요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한용운 시인 /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예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집 『님의 沈默』(회동서관 , 192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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