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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상화 시인 / 말세의 희탄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12.

이상화 시인 / 말세의 희탄(欷歎)

 

 

  저녁의 피묻은 동굴 속으로

  아ㅡ 밑 없는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거꾸려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다

  아ㅡ 꿈꾸눈 미풍의 품에다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 취한 몸을 세우련다.

  나는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련다


백조, 1922. 12

 

 


 

 

이상화 시인 / 단조(單調)

 

 

  비 오는 밤

  가라앉은 하늘이

  꿈꾸듯 어두워라.


  나뭇잎마다에서

  젖은 속살거림이

  끊이지 않을 때일러라.


  마음의 막다른

  낡은 띠집에선

  뉜지 모르나 까닭도 없어라.


  눈물 흘리는 적(笛) 소리만

  가없는 마음으로

  고요히 밤을 지우다.


  저-편에 늘어 서 있는

  백양(白楊)나무 숲의 살찐 그림자에는

  잊어버린 記憶이 떠돎과 같이

  침울(沈鬱)-몽롱(曚朧)한

  「캔버스」위에서 흐느끼다.


  아! 야릇도 하여라.

  야밤의 고요함은

  내 가슴에도 깃들이다.


  벙어리 입술로

  떠도는 침묵(沈默)은

  추억(追憶)의 녹 낀 창(窓)을

  죽일 숨쉬며 엿보아라.


  아! 자취도 없이

  나를 껴안는

  이 밤의 홑짐이 서러워라.


  비 오는 밤

  가라앉은 영혼(靈魂)이

  죽은 듯 고요도 하여라.


  내 생각의

  거미줄 끝마다에서도

  작은 속살거림은

  줄곧 쉬지 않아라. 


백조, 1922. 12

 

 


 

 

이상화 시인 / 가을의 풍경

 

 

  맥 풀린 햇살에 번쩍이는 나무는 선명하기 동양화일러라

  흙은, 아낙네를 감은 천아융 허리띠 같이도 따습어라

 

  무거워 가는 나비 나래는 드물고도 쇠(衰)하여라

  아, 멀리서 부는 피리 소린가!  하늘 바다에서 헤엄질하다

 

  병 들어 힘없이도 섰는 잔디풀 ㅡ 나뭇가지로

  미풍의 한숨은, 가는(細) 목을 메고 껄떡이어라

 

  참새 소리는, 제 소리의 몸짓과 함께 가볍게 놀고

  온실 같은 마루 끝에 누운 검은 괴의 등은, 부드럽게도 기름져라

 

  청춘을 잃어버린 낙엽은, 미친 듯, 나부끼어라

  서럽게도, 길겁게 조으름 오는 적멸(寂滅)이 더부렁거리다

 

  사람은, 부질없이, 가슴에다, 까닭도 모르는, 그리움을 안고,

  마음과 눈으로, 지나간 푸름의 인상(印像)을 허공에다 그리어라

 

1922년 1월《백조》창간호 발표

 

 


 

 

이상화 시인 / 파~란 비

 

 

파~란 비가 「초~ㄱ 초~ㄱ」

명주 씻는 소리를 하고

오늘 낮부터 아직도 온다.

 

비를 부르는 개구리 소리

어쩐지 을씨년스러워

구슬픈 마음이 가슴에 밴다.

 

나는 마음을 다 쏟던 바느질에서

머리를 한 번 쳐들고는

아득한 생각으로 빗소리를 듣는다.

 

「초~ㄱ 초~ㄱ」 내 울음같이

훌쩍이는 빗소리야

내눈에도 이슬비가 속눈썹에 듣는고나.

 

날 맞도록 오기도 하는

파~란 비라고

서러움이 아니다.

 

나는 이 봄이 되자

어머니와 오빠 말고

낯선 다른 이가 그리워졌다.

 

그러기에 나의 설움은 파~란 비가 오면부터

남부끄러 말은 못하고

가슴 깊이 뿌리가 박혔다.

 

매몰스런 파~란 비는 내가 지금 이와 같이

구슬픈지는 꿈에도 모르고  

「초~ㄱ 초~ㄱ」나를 울린다

 

월간 『신여성』 1926년 발표

 

 


 

 

이상화 시인 / 비음(緋音)

-緋音의 序詞

 

 

  이 世紀를 물고 너흐는, 어둔 밤에서

  다시 어둠을 꿈꾸노라 조으는 조선의 밤ㅡ

  忘却 뭉텅이 같은,이 밤 속으론

  햇살이 비추어 오지도 못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배부른 군소리로 들리노라

 

  낮에도 밤ㅡ 밤에도 밤ㅡ

  그 밤의 어둠에서 스며난, 뒤지기 같은 신령은,   

  光明의 목거지란 이름도 모르고

  술취한 장님이 머-ㄴ길을 가듯

  비틀거리는 자욱엔, 핏물이 흐른다!    

 

월간 『開闢(개벽)』 1925년 발표

 

 


 

 

이상화 시인 / 나의 寢室로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촉(燭)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窒息)이 되어, 얄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느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피란 피 가슴의 샘이, 말라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

 

'마돈나',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동인지 『白潮(백조)』 3호 1923년 9월 발표

 

 


 

 

이상화 시인 / 시인에게

 

 

  한 편의 시 그것으로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때라야

  시인아, 너의 존재가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질 것이다.

  가뭄 든 논에는 청개구리의 울음이 있어야 하듯,

 

  새 세계란 속에서도

  마음과 몸이 갈려 사는 줄 풍류만 나와 보아라.

  시인아, 너의 목숨은

  진저리나는 절름발이 노릇을 아직도 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일식된 해가 돋으면 뭣하며 진들 어떠랴.

 

  시인아, 너의 영광은

  미친 개 꼬리도 밟는 어린애의 짬 없는 그 마음이 되어

  밤이라도 낮이라도

  새 세계를 낳으려 손댄 자국이 시가 될 때에 있다.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를 보아라.

 

월간 『開闢(개벽)』 70호 1926년 6월호 발표

 

 


 

 

이상화 시인 / 가을의 풍경

 

 

  맥 풀린 햇살에 번쩍이는 나무는 선명하기 동양화일러라

  흙은, 아낙네를 감은 천아융 허리띠 같이도 따습어라

 

  무거워 가는 나비 나래는 드물고도 衰하여라

  아, 멀리서 부는 피리 소린가!  하늘 바다에서 헤엄질하다

 

  병 들어 힘없이도 섰는 잔디풀 ㅡ 나뭇가지로

  미풍의 한숨은, 가는細 목을 메고 껄떡이어라

 

  참새 소리는, 제 소리의 몸짓과 함께 가볍게 놀고

  온실 같은 마루 끝에 누운 검은 괴의 등은, 부드럽게도 기름져라

 

  청춘을 잃어버린 낙엽은, 미친 듯, 나부끼어라

  서럽게도, 길겁게 조으름 오는 적멸寂滅이 더부렁거리다

 

  사람은, 부질없이, 가슴에다, 까닭도 모르는, 그리움을 안고,

  마음과 눈으로, 지나간 푸름의 印像을 허공에다 그리어라

 

동인지 『白潮』 1호(창간호) 1922년 1월 발표

 

 


 

 

이상화 시인 / 통곡(痛哭)

 

 

  하늘을 우러러

  울기는 하여도

  하늘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닯아

  하늘을 흘기니

  울음이 터진다

  해야 웃지 마라

  달도 뜨지 마라

 

월간 『開闢(개벽)』 68호 1926년 4월호 발표

 

 


 

 

이상화 시인 / 병적계절(病的季節)

 

 

  기러기 제비가 서로 엇갈림이 보기에 이리도 설은가.

  귀뚜리 떨어진 나뭇잎을 부여잡고 긴 밤을 새네.

  가을은 애달픈 목숨이 나누어질까 울 시절인가 보다.

 

  가없는 생각 짬 모를 꿈이 그만 하나 둘 잦아지려는가.

  홀아비같이 헤매는 바람떼가 한 배 가득 구비치네.

  가을은 구슬픈 마음이 앓다 못해 날뛸 시절인가 보다.

 

  하늘을 보아라 야윈 구름이 떠돌아다니네.

  땅 위를 보아라 젊은 조선이 떠돌아다니네.  

 

월간 『朝鮮之光(조선지광)』 61호 1926년 11월호 발표

 

 


 

이상화 [李相和, 1901.4.5~1943.4.25] 시인

1901년 대구(大邱)에서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경성 중앙학교에서  수학. 1921년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單調」, 「가을의 風景」, 「末世의 欷嘆」을 발표하며 등단.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및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

《개벽》誌를 중심으로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의 동인. 시인이며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 교육자, 권투 선수로도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