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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한옥 시인 / 뿌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3.

 

손한옥 시인 / 뿌리

 

 

너가 내게로 오는 길은 참 좋겠네 장미, 수수꽃다리, 설유화 가득 핀 꽃 길만 따라오면 그곳에 나 목화 옷 입고 서 있으니 내가 네게로 가는 길은 참 가팔라, 아카시 뿌리를 넘어 탱자나무를 지나 얽히고 설킨 산딸기 넝쿨을 지나 그 곳에 너 억새풀잎 옷 입고 서 있으니 나를 조립한 너는 참 좋겠네 뱀딸기 열매 따다 산호라 해도 기왓장 빻은 가루 밥이라 해도 분꽃 씨 꽃분을 내 얼굴에 발라 줘도 나는 춤추는 사이보그. 너를 선택한 나는 참 서늘하네 산을 들이라 해도 믿어야 하고 나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너가 사람이 아니라 해도 믿어야 하고 짐승으로 보이는 강아지도 사람이라 말하면 믿어야 하는, 어둡고 추운 이 별에서 내리고 싶은데 지독한 뿌리는 뽑히지 않네 한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또 와도 지극한 뿌리는 뽑히지 않는다네 치유되지 않는다네 그러나 치유의 길 한 가지, 죽음만이 그 뿌리 뽑을 수 있다네 죽어야 그 뿌리 뽑힌다 하네 그 뿌리 살아 불멸의 제국으로서겠네

 

시집 『13월 바람』(시산맥, 2017) 중에서

 

 


 

 

손한옥 시인 / 직설적, 아주 직설적인

 

 

어머니는 시인이었다

직설적인 시인이었다

백석보다 향토적이고 정지용보다 활유적이었다

행위에 가장 적절한 언어를 장치하고 오장육부를 도려내 굵은 소금을 뿌리고 바늘로 찔렀다

 

安東孫 문중에 연애결혼은 내가 처음이었으니

이 일은 벼락을 칠 일이기도 했지만

나를 키운 구 할은 어머니의 욕이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독설의 항아리는 어디에 숨겨뒀을까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ㅡ팔 남매로 자라면서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욕이다, 라고 하지만

 이건 우리 마을 어귀에 서있는 당나무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니다

 

ㅡ사당패같이 돌아 다니는 년

ㅡ머리 피도 안 마른 것이 머슴아 만나는 년

ㅡ쌔가 만발이나 빠질 년

ㅡ주딩이가 열 닷 발이나 나온 년

ㅡ조둥이가 염포창날 같은 년

ㅡ갈롱 부리다 얼어 죽을 년

ㅡ지 에미 잡아먹을 년

ㅡ엄발이 돋을 데로 돋은 년

ㅡ어른이 나무랄 때 한 마디도 안 지고 아바리 총총 하는 년

ㅡ제 어미 알기로 발가락새 때만도 안 여기는 년

ㅡ양탈비탈 둘러대고 돌아다니는 년

이런 년, 나를 두고 어머니는

ㅡ고렇게 사람 말 안 들으면 눈에 밍태 껍데기 붙이고 영남루 다리 밑에 있는 너거 엄마한테 데려다 줄거라고

ㅡ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니 닮은 딸 하나 낳으라고

축원하고 또 축원하셨다

어머니, 수 년을 산문(産門) 닫고 사시다가 새삼스런 마흔에 나를 낳고

한풀이란 한풀이는 다 하셨네

 

달도 없는 그믐밤, 대숲이 으스스 흔들리던 밤, 갈가지 자갈 던지는 밤

밤똥을 눌 때마다 엄마는 한 겨울에도 속옷 바람으로 따라와 앉아 있다가

닭장 앞에 데려가서 절 시키고 말 시켰다

ㅡ달구님요 달구새끼님요 닭이 밤똥 누지 사람이 밤똥 누능교

인심 좋은 달구님요 우리 아, 밤똥 가져 가이소

누가 죽여도 모를 캄캄한 밤 이런 날이 잦았지만 그때 엄마는 한 마디도 욕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명태 껍데기를 붙인 엄마가 다리 밑에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 어느 날 몸살로 낮잠 자고 있을 때 내 이마를 짚으며

ㅡ우찌하꼬, 이래 열이 펄펄나서…맨날 지엄마를 다리 밑에 있다 했더니 참말로 여기고 쯔쯔…

나는 다 들었지 다 듣고 말았지

참말로 좋았다 할머니 같은 우리엄마, 펄펄 열이나도 좋았다

 

어머니의 축원은 영험이 없었다

결국 나는 아들만 둘 낳았다

단 한 번도 나는 두 아들 앞에 직설적이지 못했다

정말로 지랄할까봐 못했고

정말로 미칠까봐 못했고

혀가 빠질까봐 못했고

남사당패가 될까봐 못했고

말대로 될까봐 못했고,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욕을 주시면서

내가 건너지 않아야할 강을 보여 주셨고

나에게 마르지 않는 눈물샘을 주셨고

어머니의 우량한 시 종자를 주셨다.

 

시집 『직설적, 아주 직설적인』(천년의시작, 2010) 중에서

 

 


 

손한옥 시인

경남 밀양에서 출생. 2002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목화꽃 위에 지던 꽃』(시평사, 2006)과 『직설적, 아주 직설적인』(천년의시작, 2010),  『13월 바람』(시산맥, 2017)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