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인숙 시인 / 따지고 보면 그것은 립스틱 때문이야
입술을 내밀고 립스틱을 바른다 바를수록 지워지는 립스틱의 은밀함은 스스로 지워지는 것인가 다른 입술로 옮겨가는 것인가
따지고 보면 이것은 순전히 너의 일이고 나의 일이 아닐 테지만 빨강 위에 빨강을 덧바르는 일 내가 아침이면 너도 아침이다 아침을 네 입술에 올려놓으면 밑줄 친 아침이 길어진다 아무리 덧발라도 우린 멀어지겠지
따지고 보면 이것도 순전히 너의 일이고 나의 일이 아닐 테지만 여자들이 빨강을 물고 지나간다 오렌지 망고 보테니칼 워터 프루프 물렁거리는 빨강 걸어 다니는 빨강 입술이 몰려다닌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순전히 너의 취향일 테지만 달력 속 타히티 여인들이 두꺼운 입술을 내민다 원색의 질감 위로 빨강이 녹아 흐른다 늙지도 않는 빨강 도톰한 빨강 위에서 춤추는 숫자들 여인들 머리에 꽂은 꽃이 빨강으로 흔들린다 해변에 선 석상들은 한 줄로 서서 서쪽만 바라보는데 바위 속 얼굴 위로 번지는 석양의 립스틱은 생각만큼 달콤할까
여자가 거울 속에 앉아 립스틱을 지우는 동안 돌아선 네 등은 석상처럼 단단해졌다 지금쯤 석상은 그림자까지 지웠을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순전히 거울 속에서 지워져 가는 여자들의 입술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시집 『구름이 지나가는 오후의 상상』(시산맥, 2017) 중에서
최인숙 시인 / 베어링
이것은 달의 궤적에 관한 질문이며 너와 나의 접점에서의 전동체계에 관한 문제
베어링을 품고 잠이 든다 방향에 대한 껄끄러운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한다 밤길의 가로등을 보다가 요즘 따라 해가 지지 않는다는 네가 사는 마을을 생각한다
오늘 베어링은 동쪽으로 뻗은 가지 끝을 건드리고 있다 네가 사는 곳은 아직도 멀다 밤이 느리게 되감기는 동안
베어링이 많이 마모되었다 재설정된 궤도 너와 나의 접점을 위해 나는 밤마다 베어링에 윤활유를 치고 잠이 든다 벽에 걸린 숫자들이 빨라진다
시집 『구름이 지나가는 오후의 상상』(시산맥, 2017)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강영은 시인 / 동물성 (0) | 2019.05.24 |
|---|---|
| 이주언 시인 / 사랑은 외 2편 (0) | 2019.05.24 |
| 서주영 시인 / 쓸쓸한 유랑 외 1편 (0) | 2019.05.23 |
| 손한옥 시인 / 뿌리 외 1편 (0) | 2019.05.23 |
| 이석균 시인 / 의도한 조우 (0) | 2019.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