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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주영 시인 / 쓸쓸한 유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3.

서주영 시인 / 쓸쓸한 유랑

 

 

  이것은 난해한 미로다

 

  밀물과 썰물이 잘게 찢어놓은 지도로

  강화도 앞바다가 온통 어지럽다

 

  네게로 가는 길은 좀체 보이질 않고

  판독 어려운 지도는 내게

  갈 길을 일러주지 않는데

  이 숱한 길을 두고

  난 또 얼마나 헤매야만 네게 닿는 걸까

 

  널 향해 응어리진 화석 같은 슬픔 덩이들이

  날카로운 지느러미 세워 소리 지르는 서해

 

  네게 닿기 위해 쉬지 않고

  울며, 울며 널 부르는

  유빙(流氷)이란 이름을 가진 가여운 나는

  더러는 하얗게 까무러치기도 하는

  겨울 섬이다

 

시집 『나를 디자인하다』(미네르바, 2017) 중에서

 

 


 

 

서주영 시인 / 일력(日曆)

 

 

  무화과나무 앞에 서면

  일력에 꾹꾹 눌러쓴 일생이 보인다

 

  모든 것을 안으로 안으로

  묵묵히 담아낸

  하루치 울음이 붉은 동그라미로 그려진

  늙수레한 엄마가

 

  무화과나무 앞에 서면

  뭉툭한 무릎에 덜 아문 상처를 매단 채 버티는

  덤덤한 표정이 보인다

 

  가슴을 헤치면

  날짜마다 벌건 슬픔으로 차 있는

 

  그래서 無花果는 無火果

  안으로 화를 담고도

  적막한 시간을 묵묵히 건너온

 

  또한 無花果는 無化果

  상처도 눈물도

  아예 없었던 일처럼 고요한

 

시집 『나를 디자인하다』(미네르바, 2017) 중에서

 

 


 

서주영 시인

충남 아산에서 출생. 2009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으로『나를 디자인하다』(미네르바, 2017)가 있음. 2017년 제3회 박종화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