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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주언 시인 / 사랑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4.

이주언 시인 / 사랑은

- 프로이트 어법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듯한 망상

얼굴 표피적 구성에 끌림

무심한 듯 극히 사소한 듯 행동하는 강박

가짜와 진짜 사이 시달림

이미 소망과 불안의 형태로 자리잡음

외상이라 부르는 경험

때론 소화할 수 없는 장애

과거의 시점에 고착되어 헤어나지 못할 수 있음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소유

계통 발생적으로 계승되는 리비도

집요한 의심과 고통의 징후를 형성하는 힘

제지당하는 정신적 과정의 종신 반복

성적 만족과 충돌하는 구멍난 방어선

외부세계를 지각하는 예민성

상시적 욕구불만

굴곡이 따르는 감정의 전이

기억의 회생과 재생의 단절

무의식의 미끄러짐 혹은 의식의 모호함

 

결국, 가짜인 줄 알면서도 그리움

결론적으로, 본능과 자아의 지난한 투쟁

생화학 부록 추가, 알고리즘에 따른 호르몬 작용의 부산물

 

계간 『힐링문화』 2018년 가울호 발표

 

 


 

 

이주언 시인 / 나의 그릴

 

 

나의 아침 그릴은 바쁘다. 고구마 토마토를 구우며 기억이 모호한 새벽꿈을 그릴, 창에 서성이는 햇빛을 오려 식탁에 얹을 조각 빛을 그릴, 오래된 도자기 속 음식이 육즙의 무늬와 진한 냄새로 배어들며 그릴, 그걸 바라보며 침을 삼켰을 중생들의 목구멍 그릴, 꼬챙이에 꿰인 채 환하게 돌아가는 통닭처럼 몸피들은 점점 오그라들고, 살았으면 더 오그라들었을 엄마의 표정도 그릴, 눈을 감아야 보이는 떠난 애인의 얼굴도 그릴, 나의 아침 그릴은 바쁘다. 그릴은 소리의 파동에도 있다. 달팽이관 울리며 그릴, 마주 앉아 음악을 듣던 기분과 주전자에 끓어오르던 수증기와 잎사귀 밟히던 소리까지 그릴, 자동차에 치인 고양이의 비명과 쓰레기통에 함께 버려진 열쇠의 짤랑거림을 그릴, 자물쇠 열고 들어가지 못했던 그의 심장과 내가 거처했던 수많은 탄식을 그릴, 내 영혼의 먹이를 요리하느라 분주한 나의 아침 그릴.

 

계간 『시인정신』 2018년 겨울호 발표

 

 


 

 

이주언 시인 / 옷을 홀랑 태운 사과나무

 

 

어제 먹다 남긴 사과가 접시 위에서 익어간다.

 

어제의 이빨 자국이 완강할수록 사과의 뼈는 더욱 향기롭다. 어제의 어제가 사과처럼 먹어치운 엄마도 익을수록 향기로웠다. 내 속의 들판에서 아직 홀로 익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먼 곳의 사과처럼 산다. 별자리 구성으로 설계되었을 사과의 운명을 수천 년 후의 내가 제멋대로 맛본다.

 

정갈한 숫양처럼 잘 익은 사과 몇 알이 제단에 오른다.

 

우주망원경으로 보았던 달의 맨얼굴과, 가끔 떠오르는 엄마의 표정과, 야생의 번제물들은 서로 서신을 주고받는 것 같다. 청신할 때마다 양의 피를 땅에 뿌리는 계절처럼 되살아난다. 반려를 빼앗긴 자의 푯말 주위에는 기도가 흥건하다. 수많은 외짝의 얼굴들이 정물처럼 나무에 달려 있다.

 

들판에는 사과에게 옷을 입혀주는 나무가 있다.

 

한 접시에 담긴 북반구 사과와 남반구 사과의 정물은 서로 다른 욕망의 무게를 껴입었을까. 단벌옷 태우고 나면 이제 무얼 제물로 바치나. 몸속 미립자의 움직임이 사과의 운명을 좌우한다. 꼭지에 힘이 빠질 때 생리장애를 일으킨 사과는 투하되는 걸까 날개를 다는 걸까.

 

더 농익기 전에 이별 서약을 하는 거라오,

 

오븐 속 사과파이가 분명한 표정으로 익기 시작할 무렵 옷이 타들어가는 들판의 나무는 이별 노래를 부른다. 사과밭에 붉게 번진다. 홀랑 태워버리는 가을의 습성, 나무속의 들판에서 재가 되어 자란다. 엄마에게도 다홍치마를 태워주자는 전화가 왔다. 죽어서 다시 사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계간 『애지』 2018년 겨울호 발표

 

 


 

이주언 시인

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08년 《시에》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꽃잎고래』(시에, 2012)가 있음. 제3회 창원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