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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종원 시인 / 다시 새벽이 오면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4.

김종원 시인 / 다시 새벽이 오면

 

 

귀 기울이면

들린다.

그저 그렇게 다시 새벽이 오고

 

긴긴 밤

바람이 불었고 비가 내렸다.

잠들지 못한 들고양이가 앙칼지게 울었고

꿈속에서도 온갖 쓸모없는 걱정을 하고

 

들린다.

이른 새벽.

혹시 가족들이 잠 깰까 봐

조용히 집을 나서는

아버지 발자국 소리.

 

조금씩 조금씩

귀에서 멀어질수록

가슴 깊이 더욱 선명하게 울리는

그 소리.

 

들린다.

또 아무렇지 않은 듯

새벽이 오면

 

누군가는 버스에서 졸고

누군가는 군대 간 아들 걱정을 하고

누군가는 비어버린 통장의 잔고를 걱정하고

누군가는 아픈 아들의 손을 잡고 멍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듯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위해

가슴 한 곳을

늘 비워 두는 일이다.

 

2017년 소금시 앤솔로지 “귀”/ 시와소금

 

 


 

 

김종원 시인 / 안경알을 닦으며

 

 

방 안 가득 훤히

불을 켜 두고도

못 미더워

 

책상 위에

스탠드 불을 켠다

 

내가 인식하지 못한 불빛 속

어둠의 흔적들이

나의 눈을 자꾸 흐리게

하고

 

강박증을 떨쳐 버리려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안경알을 닦고

또 닦는다.

 

무크지『울산작가』 제25호(울산작가회의, 2018) 발표

 

 


 

 

김종원 시인 / 신명리에서. 3

 

 

누군가 나를 부른다.

 

돌아보면

그저 어둠 뿐

 

누군가 한바탕 흐느껴 울다

웃는다.

점점 어둠은 깊어 가고

어둠에 온전히 젖지도 못한 나는

불안한 자세를 하고 선체

혹시 이 어둠 속에서도

꽃은 필까?

헛된 상상을 해 본다.

 

그래 세상 일 이란 게

늘 그런 거라고

체념할 수만 있다면

 

꽃은 항상 그 자리에 선체로 아름다울 수 있을까.

순간 나의 얼굴을 스치며 한 줄기 바람이 지나 간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어둠 속 그 어디쯤에서

쏴 - 와아아-

쏴 - 와아아-

무리지어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다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문득

되돌아와

처얼썩

나의 등에 업힌다.

 

시집 『새벽 7번 국도를 따라가다』(시와 소금, 2016) 중에서

 

 


 

 

김종원 시인 / 겨울풀

 

 

야야 보거래이

우리가 이렇게 입 다물고 있능 거

할 말이 없어서가 아이대이

우리도 할 말이사 많이 있능기라

 

우리가 누렇게 뜬 얼굴로

비틀거리면서도

맵차디 맵찬 겨울 바람

한사코 견디어 내는 것은

뿌리가 있기 때문이대이

 

뿌리는 우리에게 믿음인기라

뿌리는 우리에게 힘 인기라

 

야야 이제사 알겠제

꽁꽁 얼어붙은 땅 속 깊이

꿋꿋이 내려 뻗은 우리의

힘을

 

우리에게 만약 그런 힘 없었다면

우리에게 그런 칼날 같은 믿음 없었다면

우린 쓰러져도 벌써 쓰러지고

말았을 기라

 

야야 똑똑히 보거래이

지금 이렇듯 누런 이파리 흔들어대는 건

우리가 뿌리로만 엉키며 살아가는 건

이 겨울 뒤에 찾아 올

어느 봄날에

물결치듯 온 땅에

와아와아 꽃으로 피어나

한바탕 멋지게 어우러져 춤추고 싶은 기라

야야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능기라.

 

시집 『새벽 7번 국도를 따라가다』(시와 소금, 2016) 중에서

 

 


 

 

김종원 시인 / 말혀

 

 

할 말 있지 분명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면 안 돼

 

숨기려고 할수록

자꾸만 드러나게 되는 법

부끄러운 일이야

 

말혀

 

할 말이 있다고

어서

모르는 척 넘어 가면

안 돼

그건 부끄러운 일이야.

 

시집 『다시 새벽이 오면』(시산맥, 2018) 중에서

 

 


 

 

김종원 시인 / 명상

 

 

눈을 뜨고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답답하다.

무엇이

지친 우리들의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눈을 뜨고

보면

모든 것이

막막하다.

 

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안타까운 눈망울들이

강물이 되어

쫓기듯 바다로 간다.

 

눈을 뜨고 보면

보이지 않던 이름들이

눈을 감고 바라보면

보인다.

 

시집 『다시 새벽이 오면』(시산맥, 2018) 중에서

 

 


 

 

김종원 시인 / 노동 현장에서 쓴 편지 외 4편

-시인에게

 

 

참 이상해요.

몰골이 된 당신이

몰골의 시를 쓸 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에요.

당신의 시를 읽으면

우리 병든 가슴이 뜨거워요.

 

요즈음에도 시가 있었나요.

당신도 시인인가요.

우리같이 천하디 천한 것들은

당신의 애인이 될 수 없나요.

 

시가 무엇인지 잘은 몰라도

당신의 시를 읽으면

가슴에 뜨거운 불길이 이는

우리를

당신만은 무식한 공순이라고

업신여기지는 않겠지요.

 

우리는 세상 모든 것들 다 못 믿어도

당신만은 믿고 싶어요.

당신도 우리 같은 공돌인가요.

기름냄새 뻑뻑이 배어 있는

시를 쓰는 당신은 우리의 고통을

사랑할 수 있나요.

 

우린 당신을 믿어요.

당신의 시를 믿어요.

 

 


 

 

김종원 시인 / 가을은 몸살 앓는 계절

 

 

가을이면 어떻고

겨울이면 어떤가

일당 3천 6백원짜리 막노동판에서

등골이 곪아 줄줄 땀으로 쏟으며

못 배운 놈 돈 벌어 잘 살겠다는 꿈도

아랑곳없고

I빔에 치인 발가락만

작살이 나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지

나의 애인의 이름을 생각할 때는

 

의무교육을 겨우 끝내고

월급 10만원도 안 되는 공순이가 되어

왼 종일 미싱을 밟으며

꿈꾸던 행복이여. 자유여.

있는 놈 없는 놈 죽어 없어지기는

마찬가지고

곪아 터진 가랭이 벌려 놓으면

그곳이 우리의 고향인데

가을이면 어떻고

겨울이면 또 어떤가.

작살난 발가락이 잘려 나간 자리에

찬바람 보다 매서운 깊이로

몰려오는 통증에 시달리며

이 가을에 우리가 앓는 몸살이

아스피린이나 마이신으로 치료

될 수 있는가.

 

 


 

 

김종원 시인 / 農民悲歌.1

 

 

오늘 아침

공납금 주지 않는다고

울고불고 우리 온 가족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간

막내 놈 때문에

우리는 모두 울어야 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럽게 서럽게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야 했다.

 

80을 넘은 우리 할머니도 울고

땅만 파다 허리 꼬부라진 아버지도 울고

부엌문에 기대어 "못난 에미 만난 죄다"시며

우리 어머니 더욱 슬피 우셨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훌쩍훌쩍 속으로만 삼켜야 했던 가난

오월의 땡볕 아래서

까맣게 핏기를 잃어 가는 얼굴과

딱딱하게 굳어버린 손끝에서

부서지던 바람소리여.

 

누가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 같잖은 말을 하고 지나가는가.

우리가 코피 줄줄 쏟으며 빈혈로 쓰러져 갈 때

밥은 못 먹겠다고 햄버거 버터 운운하던

너희들이

어찌 가난을 알아

가난을 이야기하는가.

그 소리 다 헛소리라고 하더라도.

 

 


 

 

김종원 시인 / 農民悲歌.2

 

 

오늘날에

누가

"農者天下之大本" 어쩌구 저쩌구

함부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지게에 짓눌려 골병만 든

우리 할아버지 앞에서

무슨 염치로

복지 농촌 잘 사는 마을 운운

할 수 있는가.

 

꼬부라진 허리와 등골 곯아 신경통이 된

우리 아버지의 병든 몸뚱아리와

퍼렇게 시퍼렇게 멍든 가슴 외엔

남은 것이라고는

뼈저린 가난 밖에 없는

이 현실 앞에

누가 잠꼬대라도

공기 조고 물 맑아 살기 좋겠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는가.

 

 


 

 

김종원 시인 / 農民悲歌.3

 

 

흙이 무엇이더냐.

너희 조상들의 살과 뼈가 아니더냐.

그런데 왜 슬프지.

이렇게 푸른 오월의 보리밭 옆에 서면

 

흙냄새 피 냄새 배일대로 배인

이 땅이 어디더냐.

나라 망하고 새나라 건설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희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벼슬아치로 몰리며 쫓겨 와

가난의 뿌리를 박은 땅

한 맺힌 유배지가 아니더냐.

그런데 왜 할 말이 없지.

이 하늘 아래서는

말하지 않는 게 좋아

침묵 하여라. 지금은

훗날 더 큰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너희 아버지가 코피 줄줄 쏟으며

씨 뿌리고 살아온 땅

너희 오 남매의 배고픔이 눈물 되어

선명하게 얼룩진 땅

오늘은 침묵.

내일의 더 큰 진실을 위한

침묵 연습.

 

1986년 시전문 무크지 《시인》 등단시

 


 

김종원 시인

1960년 울산에서 출생. 1986년 시전문 무크지 《시인》으로 등단. 시집으로 『흐르는 것은 아름답다』, 『새벽 7번 국도를 따라가다』,  『다시 새벽이 오면』 등이 있음. 2016년 울산광역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8년 울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울산작가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