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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재영 시인 / 경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6.

최재영 시인 / 경계

 

 

무릇, 봄은 남녀상열지사라 하더이다

아예 色을 지운 백목련 남녘의 기운이 무르익자 아무도 모르게 가슴 두근거리더이다 단단히 옭아맨 빗장엔 이미 불순한 신열의 흔적이 낭자해 열에 들뜬 혈점들 순식간에, 급기야 北을 向해 돌아섰다는데 이유인즉슨 춘풍에 솔깃한 속내를 차마 내색하고 싶지 않은 것 陰(음)의 기운이 성하여 기어이 백치의 몸짓으로 피어나는 것 춘삼월 그리움에 겨운 처자들이 핏기를 잃어가는 까닭이니 이에 경계를 세움이 옳더이다 남녀상열지사들 소리 높여 고하더이다 온갖 향기들 오매불망 속 끓이는 때 도저하고 침울한 저 色은 어떤 경계도 무용하더이다 생생하게 스며드는 陰(음)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하더이다 부디 北向花라 이름지어 그를 두려워하라 이르시오니,

 

봄이 뿌리째 흔들리자

서둘러 北을 向해 우러르는 뒷모습들

피고 지는 것이 본디 한 가지(枝)임을 알겠다

 

계간 『열린시학』 2010년 겨울호 발표

 

 


 

 

최재영 시인 / 파미르 한 줄기

 

 

  총총 파를 썰다가 도마 위로 번지는

  맵고 아린 파문을 본다

  파의 원산지는 총령, 파미르 고원이라는데

  후생의 늑골까지 두고두고 시려오는

  까마득한 설산을 일러 무엇하겠는가마는

  오래전 만년설을 뒤덮고 숨차게 파들거렸을

  참 멀리서 온 식물의 내막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산맥을 넘고 사막을 건너 서역을 오가는 관문

  흰 파꽃의 눈 시린 물결이

  지상의 가장 높은 지평선을 그었을 것이다

  푸른 대궁을 가르자

  팽팽하게 부풀어있던 파미르 한 줄기

  쉭, 바람 소리로 가라앉고

  짐작도 못할 높이까지 이르러서야

  실하게 속을 채운 것인지

  능선의 결마다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아, 저도 모르게 제 근원을 기웃거리며

  파랗게 매운 물이 도는 납작하고 평평한 파미르

  이 도마 위로 수많은 저녁이 건너가고

  파꽃들이 아득한 지평선을 넘어와

  익명의 하루에 스며들고 있으니

  씁쓸하고 시원하고 짜고 아린 맛이란

  빛깔과 형태가 다른 세상의 기복임을 알겠다

 

계간 『주변인과 시』 2011년 봄호 발표

 

 


 

최재영 시인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2005년 《강원일보》,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루파나레라』와 『꽃피는 한시절을 허구라고 하자』가 있음.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 창작지원금 수혜. 2016년 세종도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