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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 시인 / 정오의 기차
그는 유쾌한 농담을 한다 목젖이 커다랗게 보이도록 웃는다 흰 치아를 환하게 들어내고도 웃는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쓱 가르마를 가르며 정오에 기차가 왔다 나는 다리 아래서 기차를 무심코 바라보았다 다시 레일을 타고 온 이들은 한번쯤 가슴을 쓸어내린다 기차는 정녕 모르는 척한다 한 여자가 창가의 햇빛에 바랜 종이 장미를 멀리 던진다 그는 호주머니 속에서 필터가 구겨진 담배를 꺼내 문다 또다시 그가 큰 소리로 농담을 한다 어깨를 들썩이며 먼저 웃는다 기차가 다음 역을 향해 떠나간다 유쾌한 농담을 하며 기침을 하며 간혹 흘러간 유행가 가락을 흥얼대며 달린다 어쩌다 열병처럼 심하게 몸살도 한다 간혹 독한 담배 연기도 흘린다 언제나 레일 위에서
시집 『정오의 기차』(한국문연, 2014) 중에서
이영란 시인 / 발효2
그녀의 향수는 기만이다 엘리베이터에 기만이 갇혔다 사람들은 기만 때문에 재채기를 한다 재채기를 하는 사람들이 기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혹독한 기만을 엘리베이터에 내려두고 그 여자와 사람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렸다 엘리베이터는 남겨진 기만을 데리고 28층까지 올라갔다 강아지를 키우는 여자는 기만에 취약하다 재채기가 폭발한다 또 다른 빨간 매니큐어의 기만이 1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기만이 기만과 합하여 화합을 이룬다 향수는 화장대 위에서 오롯이 진실하다 그 여자에 닿아 순정하게 발효된다 그 여자의 비밀이 관통한다 쓸쓸한 사랑만이 신기루처럼 퍼져간다
시집 『정오의 기차』(한국문연, 201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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