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성희 시인 / 식탁의 목적
저녁을 건너온 발소리를 식탁에 모았다
찬거리에 익숙한 입들은 사각 식탁의 모서리를 닮아 갔다
모두는 침묵으로 입안을 헹구고 찬물을 마셨다
통증이 욱신거리는 잇몸에서 달걀 썩은 냄새가 났다
혀가 끝없이 밥 알갱이를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목젖이 닿은 숟가락은 목이 가늘었다
금이 간 접시를 골라 생선 뼈를 담았다
식탁을 무겁게 만드는 식탁
이곳의 화법은 젓가락질처럼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유리 식탁 위를 젓가락들이 화살처럼 날아다녔다
부글부글 끓는 냄비를 생각했지만 식탁은
깨지지 않았고 유리그릇은 금만 갔다
식탁의 다리가 돌다리처럼 단단해졌다
시집 『푸른숲우체국장』(현대시학, 2015) 중에서
한성희 시인 / 궁극의 강
1
처음이라는 걸음은 어떤 궁극에 도달할지 모르는 일
비는 빗방울이기 전에 구름이었으며 구름이기 전에 강이었고 강이기 전에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빗소리에 귀를 묻고 잠이 든다 첫울음 같은 빗방울들이 단단한 땅 위에 선을 긋고 있다 빗물은 몸을 낮추고 뿌리로 휜다 산보다 먼저 나무를 거느리며 길을 모은다
휘어져 길을 따라가는 물줄기 가로질러 횡단하는 새들도 물소리를 따를 뿐 갈라지고 다시 모이고 뭉쳐 수면에서 빛난다
강에서, 길에서, 숲에서, 궁극의 뼈마디가 굵어진다
2
꽃들이 곁눈질하는 사이 물컹한 봄이 강 따라 흘러가며 흩어지고 안개의 보폭만큼 수묵 세상을 길 아래로 밀어낸다
길을 만들다 지우고 다시 길을 찾으며 쓰러진 그늘을 일으켜 세우고 초경의 몸을 핥는 전율로 처음이라는 걸음을 차근차근 불러 모으는 유랑의 강
뿌리의, 궁극의 무늬가 강 하구에서 내장을 드러내고 있다 넋의 그곳, 유물처럼 쌓여있는 유랑의 흔적들
봄을 관통하지 못하고 방향이 어두워지며 수굿이 고백하는 물안개 수면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3
어느 날부터 안개는 강을 지우고 길보다 가볍게 산보다 높게 존재한다 궁극의 물음을, 풍경의 경계를 넘보지 않을 뿐
궁극에 도달한다는 것은 아래로, 위로, 바닥으로, 허공으로, 뿌리로, 보이지 않게 깊어지는 궁리
처음이라는 걸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환한 길이 걸리고 강에는 안개들이 들어찬다
몸이 산산이 흩어져야 도달하는 길이 구름으로 떠 있다
시집 『푸른숲우체국장』(현대시학, 2015)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영란 시인 / 정오의 기차 외 1편 (0) | 2019.06.22 |
|---|---|
| 권기만 시인 / 내 안의 타클라마칸* 외 1편 (0) | 2019.06.22 |
| 이서빈 시인 / 오리시계 외 4편 (0) | 2019.06.22 |
| 이지호 시인 / 호모 심비우스 외 1편 (0) | 2019.06.22 |
| 박진형 시인 / 쇼윈도 (0) | 2019.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