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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빈 시인 / 오리시계
겨울, 오리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이면 다시 걸어 나온다.
연못으로 들어간 발자국과 나간 발자국으로 눈은 녹는다. 시침으로 웅덩이가 닫히고, 방수까지 되는 시간들.
오리는 손목이 없는 대신 뭉툭한 부리의 시간을 가지고 있어 무심한 시보 (時報)를 알린다. 시침과 분침이 걸어 나간 연못은 점점 얼어간다.
여름 지나 가을 가는 사이 흰 날짜 표지 건널목처럼 가지런하다.
시계안엔 날짜 없고 시간만 있다. 반복하는 시차만 있다. 오리 날아간 날짜들, 어느달은 28마리, 어느 달은 31마리 가끔 붉거나 푸른 자국도 있다.
무게가 덜 찬 몇 마리만 얼어잇는 웅덩이를 보면 손목시계보다 벗어 놓고 간 시계가 더 많은 것 같다.
결빙된 시간을 깨면 수세기 전 물속에 스며있던 오차들이 꽥꽥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다. 웅크렸던 깃털을 털고 꽁꽁 얼다 풀렸다 할 것 같다.
오늘밤 웅덩이는 캄캄하고 수억광년 연대기를 기록한 저 별빛들이 가득 들어있는 하늘은 누군가 잃어버린 야광 시계다.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이서빈 시인 / 균(菌)
균들은 몸을 잃은 불구다 입만 있는 생물체, 먹어 치우기만 하는 포식자 먹고 있을 때는 증상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심하지만 다 먹힌 자리는 상처가 생기거나 곪는다. 인간의 곪아가는 상처는 균의 배설이다
꽃이 만개 하려는지 열이 오르고 몸은 파르르 떨린다. 병원에 갔는데 균은 보이지 않는다. 오래 굶었던 것들 동시다발적으로 창궐한다. 약을 먹거나 예방접종은 구휼救恤하는 것 먹여서 입 다물게 하는 것이다
돌림병처럼 붉은 열꽃 뿜어내는 꽃송이 하나하나는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꽃은 배설의 자리다. 붉은 비명으로 공중을 꽉 채우지만 이내 땅이다. 비 한 줄기 바람 한 가닥에도 목을 꺾는 붉은 배설의 자리엔 허기진 입들이 초록의 떼로 몰려든다.
밋밋하던 살갗에 선홍빛이 생긴다. 예쁘고 아름다운 자리지만 꽃들의 몸은 모두 짓물러터지는 것
병원에 온 사람들을 보면 기침하는 배설 혹은 가려운 입이 팔다리 가득 붙어있고 어둡고 습진 곳 마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입들이 달라붙어 한 순간 절체절명이 꽃잎으로 터지는 증세들
인간들의 실패한 진화다 입 밖에 없는 퇴화, 보이지도 않는 균 그 불구의 포식자가 통로 한 입만 먹어도 모든 길은 차단되고 마비되는 실패한 진화
주사약처방을 받고 보면 꾹꾹 참고 있는 입들이 생각난다. 주사를 맞고 온 저녁 내 몸엔 배고픈 입들이 가득하다 오늘밤은 배부른 잠을 잘 수 있겠다.
계간 『애지』 2018년 여름호 발표
이서빈 시인 / 결
나무의 결은 나무의 나이고 물결은 물의 나입니다.
나무의 나이는 나무가 죽어야만 알 수 있어요. 결을 보는 것은 조문하는 일입니다. 고요한 물의 나이를 알려면 돌멩이 하나 던져보면 되지요.
잠깐 보여주고 사라지는 물의 나이 어느새 출몰했다 사라지는 뼈들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결을 간직하고 있지요. 반질반질한 머릿결. 여전히 가르마로 옛날 나이를 고집하는 할머니는 한 번도 구불구불한 머릿결을 가진 적 없지요.
결국 나이를 감추고 있다는 뜻이지요. 나이를 걷어내면 결은 곧 사라져요.
봄 들판에 출렁이는 결, 어린 나이도 있고 늙은 나이도 있지요. 가지런하고 걸음이 일정한 숨결. 나긋나긋하던 결이 거칠어지면 오래지 않아 굳어요. 들판을 어지럽히는 바람결에 봄 살결은 늙거나 시들어 가지요. 바람결로 나이를 먹고 시들어가는 들판이에요.
살아있는 것들은 둥근 내면의 결을 가지고 있어 여린 것일수록 결이 보드랍게 잘 휘지요.
가끔 손 없는 이불 결이 꿈결을 쓰다듬는 날이면 하늘은 연한 육질을 위해 햇빛과 별빛을 결대로 찢지요. 모든 결에서 비린내가 나는 이유지요.
청결이나 미결 같은 엉뚱한 단어들이 결사이로 끼어들기 때문이지요.
계간 『애지』 2018년 여름호 발표
이서빈 시인 / 봉황꽃
처음부터 날진 못했다 龍袍에 일편 단심을 가두고 싶었다.
왕을 사모했던 옛날이 봉황으로 피어나 손톱마다 초승달로 뜨고지며 붉은전설 피우고있다.
꽃대궁속엔 천둥 한 알 바람 한 종지 햇살 한 톨 피돌기하다 봉황 神으로 피어나 전설 엮고 한 나라를 펄럭이게 했다.
툭툭 터지는 외로움에 술약같은 상사알맹이들 쏟는다. 왕의 흔적이 땅거미로 내릴 때면 날개는 놀빛울음으로 허궁에 길을 낸다.
미처 뜨지 못하고 날아간 봉황새 눈알 울밑에서 울울한 비바람 맞으며 봉황經 소리가 봉숭봉숭 우는 여름 뱁새도 황새도 서로의 속내를 몰라 운다.
걸음이 버리고 간 발자국들, 계절 한 채 끌고간다. 한 계절은 늘 한 계절을 거슬러준다.
계간 『발견』 2017년 가을호 발표
이서빈 시인 / 36.5+36.5=1
사람에겐 사람이 플러그다. 곁이 있어야 사람이다. 힘없이 축 늘어져 누운 사람 죽 떠먹이며 아침부터 잔소리 주입시키는 사람 주사바늘들은 새싹처럼 봄 지류를 찾고 눈물방울 말랑말랑한 위로도 눈 껌뻑이는 저 몸속에 피를 보내주는 곁이다.
언제 방전될지 불안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고 플러그가 빠진 건 아니다. 섣불리 플러그를 뽑는 일은 위험하므로 모든 곁이 플러그를 찾는다. 36점 5도를 유지하는 몸 밤은 별과 달을 곁에 두고 빛은 늘 그림자를 곁에 둔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닳듯 날마다 조금씩 보이지 않게 닳아가는 의식 두 손으로 허공 휘휘 젓는 것도 곁을 찾는 일이다. 눈금이 빠르게 오르내리는 몸 저울 곁들의 불안을 부추기는 서풍저울이다. 늘 곁과 곁이라는 협력체의 살갗 살갗끼리 식지 않고 같은 체온 유지하지만 옆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헛것이라도 잡아 두어야 체온이 유지된다. 세상 보든 곁을 먹어치운다면 뜨끈하게 속이라도 뛸 것이다.
계간 『발견』 2017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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