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전기철 시인 / 발해의 말 장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2.

전기철 시인 / 발해의 말 장수

 

 

  전쟁이 끝났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점점 말을 잃어 갔다.

  나는 시리우스가 짖는 소리를 들으며 겨울밤을 떠도는 한 송이 숨이었다.

  전쟁터에서 한 사람 두 사람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귀환병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묻지 않았고

  담배를 불침번으로 세우고는

  세잔의 사과처럼 아무데나 퍼질러 앉았다.

 

  아버지의 이름 위로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모든 사물들은 우리를 외면했고

  새들도 나날이 뻔뻔스러워져 갔다.

  어머니는 외로움과 친구가 됐고

  나는 권태를 발명했다.

  내 유일한 위로는 밤하늘의 시리우스였다.

  나는 밤이면 시리우스를 데리고 먼 곳까지 갔다가

  새벽에야 돌아오곤 했다.

 

  별이 뜨지 않는 밤이 계속되었다.

  시리우스를 볼 수 없었다.

  나는 머리에 기계독을 얹고

  어둠 속을 떠도는 한 송이 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상이 군인이 마을에 나타났다.

  휘파람이라는 악기를 가지고 다니는

  낯선 패잔병이었고 떠도는 낙서였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낡은 가방에 넣고 다니는 행상이었다.

 

  어머니와 내가 고요를 머릿속에 채우고

  누워 있으면

  그 군인의 악기가 울었다.

  “나는 발해의 말 장수라네.

  수많은 전쟁을 지나왔고 국경을 넘은

  발해의 말 장수라네.

  두만강을 건너 아무르 너머

  발해의 말장수라네.”

 

  어머니는 외로움을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고

  나는 말장수의 악기가 내 심장을 연주하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두려움을 모르면 어른이 되지 않아.

  두만강 건너 아무르 너머

  말을 달리면

  안개 자욱한 초원이 있다네.

  외로운 이여,

  내 왼쪽 가슴에 난 창문을 열어

  청동 말을 타고 가면

  꿈꾸는 발해가 있다네.

 

  나는 발해의 말 장수

  세상을 건너는 말 장수

  神道로 말을 달리는 발해의 말 장수

  안개를 데리고 다니는

  발해의 말 장수

  두려움을 모르면 어른이 되지 않아.”

 

  나는 방을 뛰쳐나갔다.

  하늘에서 찬란하게 짖고 있는 시리우스가

  금세라도 나를 데리고 먼 발해로 달려갈 것만 같아

  두리번거렸지만

  발해의 말 장수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휘파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혼몽한 밤안개 사이로

  시리우스가 밤새 짖어댔다.

 

계간 『문학*선』 2011년 겨울호 발표

 

 


 

 

전기철 시인 / 블루

 

 

  강물에 나는 쓰네

  부자들의 장롱 속에서 금가락지가 녹슬어가고 있었네

  천 개의 달이 뜨는 마을에서 어머니는 밤마다

  모든 달에 이름을 지었네

  팔려간 소 이름과 사라진 언덕, 마을을 떠나버린 이들의 이름이었네

  달들은 환하게 웃거나 슬픈 얼굴로 마당을 기웃거렸네

  유독 천 개의 달 중에서 어머니가 이름을 짓지 못한

  달 하나가 있었네

  죽은 누이가 지어 놓고 떠난 이름이었네

  어머니는 달 하나에 머뭇거리며 눈동자를 출렁였고

  나는 가슴 속으로 누이가 지어 놓은 달 이름을 암송했네

 

  누이의 강에 나는 쓰네

  부자들의 장롱에서 금가락지가 떨고 있었네

  희뿌연 어스름으로 달 하나가 술 취한 아버지인 듯 걸어오면

  어머니는 누이의 달 이름을 불러 놓고는 홀로 출렁였에

  구백아흔아홉 개의 달들도 출렁였네

  누이의 강에서 달 하나가 첨벙이자

  어머니의 얼굴이 내내 흔들렸네

 

  부자들의 금가락지가 장롱 속에서 울면

  천 개의 강에 나는 쓰네

  열 살도 안 돼 죽은 누이의 강에 쓰네

  이름을 갖지 못한 세상의 모든 달에다 쓴다네

 

  밤눈이 어두운 아이가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강둑을 돌 때

  누이의 강에서 떠오르는 달 하나가

  아이의 뒤를 따르는 걸 보네

  어머니가 새벽녘에 배추를 다 팔고

  빈 광주리에 가득 담아 오는 달을 보네

  누이의 강이 날갯짓 하는 걸 본다네

  파랗게 떠오르는 강, 강, 강

 

시집 『로깡땡의 일기』(황금알, 2009) 중에서

 

 


 

전기철 시인

1954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 전남대와 서울대학 대학원서 석.박사 과정 수료. 1988년 《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나비의 침묵』 등과 평론집 『민족문학과 비평정신』 번역서 『시가 있는 금강경』등이 있음.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며 『유심』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