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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정 시인 / 라벨의 즈음
벼랑은 매일 죽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환영이거나 돌아올 수 없는 물결의 밤과 꿈 사이
앳된 너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라벨의 음악을 좋아하니 그런 어둡고 갈데없는 영혼들의 마지막 레이스 같은 거라고
한 마리의 새가 장미를 물고 투신한다
사라진 뉘앙스들
물위에 번지는 피의 일렁임을 보았다
내 검열되지 않은 상상 속에는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이 흉기를 들고 노래하는데
흩어진 파열음들
음악은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눈을 뜨면 고양이가 잠든 침대
한없이 가까워지며 침묵하는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문학동네, 2015) 중에서
박은정 시인 / 녹물의 편애
난청을 가진 아이는 어른이 되자 울 때마다 녹물을 흘리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녹이 슬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동안
나는 불협의 감정을 사랑하고 나는 병력의 감정을 사랑합니다
정성을 들여 돌아갈 곳 없어 짐승처럼 제 팔을 물어뜯을 때에도 슬픔은 쉽게 편애됩니다
소리의 어디까지 들어가야 음악이 될까요
조금씩 밤을 넘어온 탄식으로 목단꽃 이불이 젖고 있습니다
공명되던 음들이 초록으로 물들 때까지 움츠리는 소리 속의 큰 소리들
나는 무서워서 자꾸 사랑을 합니다
여자가 귀를 두드리면 허공의 낮과 밤이 흩어집니다
검붉은 말들이 울음 없이 벼랑을 내달립니다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문학동네, 201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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