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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명자 시인 / 산다는 것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9.

황명자 시인 / 산다는 것

 

 

내가 슬프니 세상이 슬프다

애인 하나 없는 언니가 슬프고

저녁이면 아무일 없다는 듯 집을 찾아드는

가족이 슬프다

가을 하늘이 너무 파래서 슬프고

누군가 풍덩 뛰어들고 싶다고 해서 슬프다

상담 시간,

흰도화지에 가족화를 그려보라니

아버지를 그리지 않는 아이가 슬프다

있는 아버지를 맘에서 지워버렸으니

삭제된 아버지가 슬프다

하지만 아버진 죽어서도 아버지라 슬프다

찬물에 밥 말아 두어 술 뜨는데

슬픔이 숟가락에 덥석 얹힌다

슬픔을 꾸역꾸역 삼키니 목이 멘다

울렁울렁 차멀미하듯 슬픔이 목구멍에서 올라온다

生이, 슬픔 천지다

 

시집 『자줏빛 얼굴 한 쪽』(서정시학, 2014) 중에서

 

 


 

 

황명자 시인 / 완경

 

 

  몇 번을 조심조심 덖어야만 저렇듯  

  제 몸 펴 보여 준다는

  백련의 깊은 몸 안에서

  꽃술 하나 용솟음치듯 불뚝 일어난다

 

  마른 백련 한 송이

  물항아리 속에서 뜨거운 물 머금는 순간

  스르르 몸 눕힌다

 

  여자들, 항아리에 담긴 백련 앞에 둘러앉아

  희희낙락 그리운 얘길 늘어놓다가

  무명치마 뒷자락에 쏟은

  어린 처녀의 월경처럼 뽈또그레 번지는

  찻물을 찻잔마다 따라 마신다

  입 안 가득 백련향이 퍼진다

  옅은 피비린내도 섞여 들어온다

 

  한 점 생리혈 같던 꽃술도 흐물흐물해지고

  찻물이 바닥을 보일 즈음,

  죽는 그 순간까지 새끼를 밴다는 암캐처럼

  순리를 거스르더라도 아직은 여자이고픈 여자들,

  한때 뭇남자들의 아름다운 여자였노라,

  가슴 쓸어내리며 한바탕 生의 고뇌를 풀어낸다

  돌아간 자리 후끈하다

 

시집 『자줏빛 얼굴 한 쪽』(서정시학, 2014) 중에서

 

 


 

황명자 시인

경북 영양에서 출생. 1989년 월간 《문학정신》으로등단. 시집으로 『귀단지』, 『절대고수』, 『자줏빛 얼굴 한 쪽』이 있음. 2014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