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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찬호 시인 / 초원의 빛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29.

송찬호 시인 / 초원의 빛

 

 

  그때가 유월이었던가요

  당신이 나를 슬쩍 밀었던가요

  그래서 풀밭에 덜렁 누웠던 것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죠

  등짝에 찰싹, 초록 풀물이 들었죠

 

  나는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아

  벌떡 일어나, 그 너른

  풀밭을 마구 달렸죠

  초록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죠

  숨은 가쁘고 바람에 머리는 헝클어졌죠

  나는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죠

 

  언덕에서 느릅나무는 이 모든 걸 보고 있었죠

  한낮의 열기 속에서

  초록은 꽁지 짧은 새들을 때렸죠

  키 작은 제비꽃들도 때렸죠

  더 짙고 아득한 곳으로 질주하는

  한줄기 어떤 청춘의 빛이 있었죠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중에서

 

 


 

 

송찬호 시인 / 겨울

 

 

  이것은 겨울과의 계약서예요

  죽은 정원을 하나 샀죠

  그러고는 서둘러 실내로 뛰어들어 왔어요

 

  겨울은 자라지 않는 이야기의 계절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씩 지금이 겨울임을

  망각하고 이렇게 묻곤 하지요

  우리집 풍자諷刺는 왜 키가 크지 않는 거죠?

 

  겨울은 언제나 참으로 길지요

  웃고 노래하고 떠들다 지쳤는지 아이들은

  이제 눈트는 씨앗의 입구에 몰려가 있어요

 

  창 밖 정원은 여전히 잠들어 있어요

  나는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깊은 상념에 잠기지요

  꽃피고 새 우는 상자

  이것의 손잡이를 어느 쪽에 붙일까 생각해야겠기에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중에서

 

 


 

송찬호 시인

1959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경북대 독문과 졸업.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에 〈금호강〉, 〈변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10년 동안의 빈 의자』(문학과지성사, 1994), 『붉은 눈, 동백』(문학과지성사, 2000),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 2000) 등이 있음.  2000년 제13회 동서문학상과 김수영문학상, 2008년 제8회 미당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