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자 시인 / 벼랑의 별
벼랑에 서 있을 때 별은 더욱 눈부시다 높은 절벽 앞에 서면 먼 이름을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들
벼랑은 절망의 끝, 질펀하게 울고 난 뒤 새처럼 털고 비상하는 비련의 4악장 한 발을 낭떠러지에 내딛었을때 질기디 질긴 저 아우성을 보라 만질때마다 피가 묻어나오는 균열의 시간들 그대는 이미 죽음보다 견고한 상처를 만진 것이다 오래 비워 둘 수 없는 제 이름과 마주친 것이다
벼랑에서는 모두가 소리가 된다 너도 소리가 되고 나도 소리가 된다 별빛 가지 흔드는 삼나무 숲처럼 스스로 묻는 자는 길을 찾는다
허공을 떠돌던 불빛이 집을 지을 무렵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들녘의 별이었던가
벼랑에 서 있을때 사람들은 눈동자처럼 깊어진다 제 몸에 홈을 파고 수렁을 내려 놓은 사람들
막다른 골목에 서 본 자만이 거친 능선을 돌아온 메아리가 될 수 있다 어둠을 흔드는 별이 될 수 있다
월간 『미주 코리안 저널 KOREAN JOURNAl』 2009년 2월호 발표
김은자 시인 / 내가 사는 계절
여름이 채 떠나기도 전 귀뚜라미 한 마리 싱크대 밑으로 스며들어 밤마다 운다 여름내 더운 국수를 끓여내던 부엌에는 귀뚜라미 울음이 앞치마처럼 걸려있고 가장 어두운 곳에 뿌려진 울음 하나 나는 가을 옷을 입고 낙엽 밟는 소리로 밥을 짓는다 사르륵 사르륵 밥 짓는 연기에 마로니에 잎이 흔들릴 때마다 흔들린 것들은 울음을 가지고 있다고 이름 지어주면서, 깊어진 것들은 흔들린 사유라고 기록하면서 후욱- 저녁을 끈다 내 안이 환해진다 어둠 속에서 울음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울음은 들꽃을 닮았다 울음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나는 꺾지 않으리라 꽃잎의 수를 세던지 꽃잎 남아있는 사연을 바람에 따라 적으며 울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리라 여름의 귀퉁이를 갉아 먹는 벌레소리에 맑은 저녁상을 차리는 밤 나는 아무도 없는 계절에 살고 있었다
시집 『붉은 작업실』(문학의전당, 2010) 중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남희 시인 / 사람을 잊은 집 (0) | 2019.06.30 |
|---|---|
| 박용진 시인 / 바림 (0) | 2019.06.30 |
| 송찬호 시인 / 초원의 빛 외 1편 (0) | 2019.06.29 |
| 최도선 시인 / 風俗圖(풍속도) 외 1편 (0) | 2019.06.29 |
| 황명자 시인 / 산다는 것 외 1편 (0) | 2019.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