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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남희 시인 / 사람을 잊은 집

by 파스칼바이런 2019. 6. 30.

박남희 시인 / 사람을 잊은 집

 

 

      아무도 간섭하지 않으므로

      꽃을 더 잘 볼 수 있다.

      구름에게 은밀히 말을 걸 수 있다.

       

      바람에게 대여료를 받지 않고도

      넉넉히 빌려줄 수 있는 어둠.

      고요가 친구라는 것도 너무 좋다.

      더 이상 자물쇠가 필요 없으므로

      느닷없는 바람의 방문이 낯설지 않다.

       

      새로운 길은 지워지고 어디론가 오래된 길이

      꿈틀거리며 무성히 자라 올라

      오래 지워져 있던 수직의 길을 복원한다.

      길이 두근거린다.

       

      수천 년 전의 너를 만날 수 있으므로

      너의 촉촉한 앙가슴이 깃들던

      토굴의 쌔끈거리던 숨소리가 자라

      송이꽃 밀어올리던 흙 내음도 더 잘 맡을 수 있다.

       

      그러니 누구도 나를 버리지 못한다.

      나는 열려있으므로 잡초를 말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나를 조금씩 헐어

      벌레들의 방언을 완성시킬 수 있다.

      벌레들은 수평의 말을 수직으로 꿈틀거린다.

       

      그것은 일종의 춤이다.

      꽃들의 몸속에 숨어있던 오래된 리듬이다.

      꽃을 더 잘 볼 수 있으므로

      이제 나는 나를 연주할 수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16년 1월호 발표

 

 


 

박남희 시인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한국문연, 1999),『이불 속의 쥐』(문학과경계, 2005) 등과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음.